▲ 권오훈 5678서울도시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

당신을 알게 된 행운

가슴이 먹먹하다. 마음속에 존경하던 스승을 먼저 떠나보내려니 공허함이 밀려온다. 모든 것이 빨리 생기고 빨리 사라지고 금방 잊혀지는 시대에 오랫동안 스승이라 부르고 싶은 존재가 있는 건 분명 운이 좋은 것이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가져야 한다.”

고인께서 즐겨 쓰시던 말이다. 참 진부하지만 강력한 말이다(돌이켜 보면 강력한 삶의 지침은 늘 진부했고 단순했다). “Cool heads but warm hearts.” 이 말은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였던 케인스의 스승인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이 케임브리지대학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의 연구실 앞에는 “런던 빈민가를 가 보지 않은 자는 들어오지 말 것”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부자들을 위한 학문인 경제학과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인간에 대한 사랑·연민·공감임을 강조한 것이다.

차가운 머리

고인은 늘 ‘실력’을 강조하셨다. 경제학으로 세상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논리와 근거를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인의 공부에 대한 진지함은 대단했다. 하루 종일 미동조차 없이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은 절로 존경심을 갖게 했다. 일화가 있다. 고인의 제자로 힘겹게 대학원을 졸업할 당시 난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한 28살 청춘이었는데, 결혼을 앞두고 주례를 부탁드렸다. 아주 명쾌하고 매정하게 거절하셨다. 학자가 주례를 보기 시작하면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주례를 서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는 학위를 따고 취업을 위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즘 세태에서 보기 드문 학자셨다.

따뜻한 심장

고인은 비정규직과 미조직 노동자, 하청노동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아웃소싱과 다운사이징은 최첨단 경영기법이었다. 이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문들은 소위 돈 안 되고 학문적 커리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분야였다.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통찰력도 남다르셨다. “전체 노동자의 40%가 노동조합 가입을 원하는데 실제 조직률은 10%에 불과하다. 노조의 사회적 힘은 결국 조직률에 따라 결정된다. 산별노조든 다른 방법이든 노동계가 풀어야 할 숙제다”라고 강조하곤 하셨다.

노동문제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과 학문적 엄격함을 강조했던 반면 인간적으로는 한없이 온화했다. 함께 떠난 태안 워크숍에서 스스럼없이 자신의 대학시절 얘기를 해 주셨다. 1970년대 탄광으로 체험활동(소위 광활)을 갔을 때의 기억,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사회운동을 하던 중 먼저 간 친구에 대한 그리움, 결국 경제학은 ‘인간’을 주목할 것이라는 예측, 노조는 쇠퇴해도 노동문제는 더 많아질 것이라는 통찰 등 평소 엄격한 수업시간에는 보지 못했던 인간적 민낯을 보여주셨다.

서울시노사정위원회 위원장으로

2012년 박원순 시장 당선과 함께 서울시노사정위원회(서울모델) 위원장으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의아했지만 한편 반가웠다. 이제 차가운 머리에 뜨거운 심장을 더하시겠구나 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노조간부들과 첫 인사자리에서 거의 1시간 동안 60명이 넘는 조합간부 하나하나에게 술잔을 권하며 건배 제안을 하는 모습은 확실히 이전 위원장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수년간 사실상 방치된 서울모델의 정상화, 막 시작된 복수노조 논란, 퇴직금 삭감 등 갈등의 확산으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냉철한 판단과 설득으로 참여기관과 노조를 확대하고 서울모델의 실질적 권한을 강화하는 등 안정화 단계로 넘어갈 즈음 돌연 사퇴하실 때까지도 큰 병을 얻으신 줄을 미처 몰랐다.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스승은 갔지만 가르침은 남아

사람에게서 상처받지만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고인은 닮고 싶은 위로가 되는 사람이었다. 고인의 삶과 글을 통해 노동조합이 나아가야 할 길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찾는다. 짧은 시로 추모를 대신한다.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밝히는 것은 마음에 있네.

선인의 말씀 좇아 현실을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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