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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유흥희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 “돌아갈 공장은 사라졌지만 새집 지을 기대에 들떠 있어요”각계 힘 모아 ‘비정규 노동자의 집’ 설립 추진 … “여름방학 외갓집 같은 쉼터 함께 만들어요”
   
ⓒ윤성희

“가난한 집 1남3녀 중 둘째로 태어났어요. 쌍둥이로. 몸이 약해서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1년 늦게 하셨대요. 남들보다 초등학교도 늦게 들어갔어요.”

쌍둥이는 돈 벌러 나간 부모 대신 숙모 손에 이끌려 입학식에 갔다. 말 없고 수줍음 많던 어린 흥희는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을 교장실로 데려다 달라고 떼를 썼다.

“쌍둥이 동생이랑 같은 반이 되는 게 싫었나 봐요. 친구들이 놀릴까 봐. 작은엄마가 ‘생전 말 한마디 안 하던 애가 웬일이냐’며 놀라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것 말고는 평범했어요.”

고등학교는 상고로 갔다. 별다를 건 없었다. '학교-집-학원'만 오가는 숙맥이었다. 학원에 나가 주산이나 타자를 배우며 취업준비를 했다. 서울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87년 여름. 정부 관제행사에 동원돼 손도 흔들었다. 이런 행사를 ‘써니텐’이라고 불렀다. 음료수 써니텐 광고 카피가 “흔들어 주세요”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고생 흥희의 눈앞에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학생의 날 다음날인 그해 11월4일이었다. 학교에 석 장의 대자보가 붙었다. 고질적인 사학비리 문제가 교사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전교조 전신인 전교협(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 교사들이 용기를 냈다.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정화여상 비리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겨울 학생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며 투쟁을 했다.

“무서워서 처음에는 앞에 나서지도 못했어요. 앞장서서 싸우는 친구들 간식이나 사다 주는 데 만족했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더라고요.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든 거죠. 참견하고 싶지 않았는데 참견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학생들은 시험 거부에 해당하는 백지동맹을 추진했다. 누구 하나라도 답안지를 작성하면 끝장이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해야 하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시험 당일. 2학년 재학생 전원이 백지를 냈다. 두려움은 사라졌다. 혼자가 아니었다.

“졸업식 날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어요. 학교비리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 미안하다고, 후배들이 학교의 주인이 돼 달라고.” 달콤 쌉싸름했던 학창시절과의 작별이었다.

세상에 눈뜨게 한 ‘정화여상 비리투쟁’

지난 25일 오전. 유흥희(46·사진)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5분 남짓 걸으니 저만치서 유 분회장이 손을 흔든다. 분회는 관리비가 포함된 월세 10만원짜리 원룸을 빌려 임시사무실로 쓰고 있다. 급하게 청소한 티가 역력한 손바닥만 한 방안에 자리를 잡으니,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던 김소연 전 분회장이 “커피 마실래요? 아니다. 더우니까, 홍초?” 한다.

유 분회장과 김 전 분회장은 정화여상을 함께 다닌 동창 사이다. 30년을 함께한 친구이자 동지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관계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각자 취업을 했다. 기륭전자엔 김 전 분회장이 먼저 들어갔다. 유 분회장은 생애 첫 해고의 쓰라림을 겪은 뒤 기륭전자에 들어갔다. 정화여상 비리투쟁을 통해 ‘운동권 조기교육’을 받았지만, 취업은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파견직으로 휴대전화 조립업체에 들어갔어요. 물량이 넘쳐 새벽 1~2시까지 일하는 건 예사였고 철야를 할 때도 많았어요. 입에서 단내가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만큼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땐 신나게 일했던 것 같아요. 해고당하기 전까지는….”

예상도 못한 상황에서 해고통보가 이뤄졌다. 회사 관리자가 파견직만 불러 놓고 대청소를 시켰다. 그러더니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다시 직장을 구해야 했다. 처음부터 기륭전자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하필 사람을 뽑는 곳이 기륭전자였다. 다시 파견생활이 시작됐다. 기륭전자는 당시 구로공단 소재 사업장 중 거의 처음으로 생산라인에 파견직을 투입한 회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단 내 대부분 사업장이 파견업체를 통해 사람을 뽑았다. 사용자들은 “회사 정문 앞에 실업자가 줄을 섰다”며 파견직을 차별하고, 아무 때고 해고를 남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2005년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가 만들어졌다.

   
▲ ⓒ윤성희 /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사진 가운데). 지난해 1월 광화문 광장에서 '2차 오체투지 투쟁'을 벌였다.

고공농성·단식농성보다 힘들었던 ‘출근투쟁’

분회가 결성된 2005년 7월 당시 기륭전자 파견노동자가 정규노동을 통해 받을 수 있는 한 달 임금은 64만1천850원이었다. 잔업과 특근 100시간을 해야 겨우 100만원의 월급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물량에 따라 해고가 수시로 이뤄졌다. 노동자들은 월요일에 출근해 옆자리 동료가 보이지 않으면 “또 해고됐구나” 여겼다. 해고 사유도 가지가지였다. 반장에게 말대꾸를 했다고, 잔업을 자주 하지 않았다고, 몸이 아프다고 잘려 나갔다. 회사는 주말 동안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했다.

분회는 기륭전자와 인력파견업체 휴먼닷컴·워크스테이션을 불법파견·임금미지급(파견직 임금차별) 혐의로 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했다. 노동부는 그해 7월 기륭전자와 휴먼닷컴이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 파견직 투입을 금지한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을 위반했다고 인정했다. 노동부 진정 결과를 받아든 분회는 그해 8월 공장을 점거하고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요구사항은 세 가지였다. 해고 중단과 사용자 성실교섭, 그리고 불법파견 정규직화다.

이렇게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뒤 1천895일이나 계속됐다. 5년 하고도 70일이다. 분회장은 구속되고 회사는 조합원 전원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54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했다. 그해 10월에는 직장폐쇄와 농성장 단전·단수가 이뤄지더니, 급기야 경찰이 조합원 전원을 연행했다.

“매일 아침 7시20분 공장 앞에 모여 출근투쟁을 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고공농성보다도 단식농성보다도 출근투쟁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걸 겪어 보지 않은 분들은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눈물 나게 가기 싫은 날도 회사 앞으로 나가야 하니까.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고…. 솔직히 도망가고 싶었죠. 그런데 뭐랄까, 조합원 서로서로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돼 있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이 줄을 끊고 도망가면, 줄줄이 끊어질 것 같은 마음. 이 관계를 지켜 내는 것이 이 투쟁의 전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회장의 야반도주, 눈앞에서 깨져 버린 복직의 꿈

'출투'보다 덜 힘들었다고 하는, 그 처참한 단식농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부에 이어 검찰에서도 기륭전자의 불법파견 혐의가 인정됐지만, 회사는 500만원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죄를 면했다. 유 분회장은 67일, 김 전 분회장은 94일을 굶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겨지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노동자들은 목숨을 담보로 싸웠다. 농성장 한쪽에 ‘근조’라고 쓰인 시커먼 관이 놓였다.

정화여상의 비리를 석 장의 대자보로 세상에 알렸던 영어교사 한석희 선생님은 제자들의 단식농성을 지켜보며 이런 편지를 썼다.

“너희들을 보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나는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는 나를 보았단다. 떨어져도 죽지 않을 사다리에서조차 조심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겠지. 바늘에 조금 찔리는 것도 살 떨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중략) 흥희야, 소연아. 너희들 앞에 놓인 관을 보고 나는 깨달았단다. 나의 제자들이 천둥번개가 내려치는 폭우 속에서 비정규직의 절규를 들어 달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영어로 가르칠 것이다. 나는 영어를 통해 비정규직 철폐의 당위성을 가르칠 것이다. 나는 사회에 나가서도 행복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돼 있다는 것을 영어로 가르칠 것이다.”

이들의 처절한 투쟁은 기륭전자 문제를 사회문제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동조단식농성을 비롯한 연대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정치권까지 가세한 끝에 2010년 11월 정규직으로의 복직합의가 이뤄졌다. 불법파견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명기한 최초의 노사합의였다.

하지만 복직의 꿈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조합원들은 복직합의에 따라 2013년 5월 서울 신대방동 기륭전자 사무실로 출근했지만, 회사는 8개월이 넘도록 이들에게 업무를 주지 않았다. 회사는 임직원을 해고하고 자산을 처분한 뒤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텅 빈 회사에서 358일간 농성을 한 조합원들은 농성장을 정리하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우리가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젠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잖아요. 다만 두고두고 원통한 대목은 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국회에서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진 사회적 합의를 회사는 너무 쉽게 무시했어요. 사회적 합의를 강제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사용자를 처벌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국회는 이런 제도를 하루라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적 합의 강제법’ 있었더라면…

2014년 12월. 서울 도심 한복판에 듣도 보도 못한 행렬이 등장했다. 분회와 연대단체 회원들이 그해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반대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에 나섰다. 얼음장같이 꽁꽁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서 이들은 두 무릎과 팔꿈치·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어지듯 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체투지가 불교의식이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전진은 비장했다.

“꼬박 10년 청춘을 바쳐 투쟁했지만 일자리도 월급도 없이 설움만 남은 상황이었어요. 그때 김소연 전 분회장이 오체투지를 제안했어요. 우리의 절박함을 알리려면 투쟁도 절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처음엔 저도 반대했어요. 그런데 최소한의 인간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제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습니다.”

눈밭을 기며 유 분회장은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업종 확대가 포함된 ‘비정규직 죽이기 대책’을 폐기하라고, 최동렬 기륭전자 회장 같은 기업사기꾼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조항을 만들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입고 있던 하얀색 바지저고리 한복이 시커먼 땟국물로 얼룩질수록 비참하다는 생각이 옅어지는 신기한 체험이었다.

유 분회장은 최근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려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복직합의를 저버리고 잠적한 최동렬 회장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여러 차례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는 행위를 한 혐의(주거침입)로 유죄가 확정된 상태였다. 합의를 어긴 회장은 두 발 뻗고 잘사는데,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한 죄로 150만원의 벌금을 내야하는 상황이 기가 찼다. 그는 차라리 강제노역을 택하겠다며 지난달 29일 제 발로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그날 밤 일이 벌어졌다.

“여성 교도관이 저더러 속옷을 벗고 검신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어요. 저는 ‘마약사범도 아니고 문신자국도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여성교도관 3명이 달려들어 강제로 속옷을 벗겼어요. 제가 울면서 항의할 때 교도관들이 내뱉은 말이 잊혀지지 않아요.”

교도관들은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나 본데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어”라며 모욕을 줬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세상은 과연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걸까.

“인권이 바닥에 떨어지고, 자신들의 말이 법이라도 되는 양 군림하려 드는 교도관들의 강압적 태도에 기가 질렸어요. 너무 끔찍했습니다. 인권은 하늘이 내려 준 권리라는데, 교도관들은 그 천부인권조차 자신들의 통제 대상인 것처럼 거리낌이 없었어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엄청난 일을 밖으로 알려야 할까 말까. 치부를 드러내는 일 같이 여겨져 쉬이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다시 꾸는 꿈 ‘비정규 노동자의 집’

“결론적으로 생각하면 문제를 공개하기 잘한 것 같아요. 부당한 것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지 않으면, 부당함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요. 이번 일을 겪으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풍족해졌잖아요. 웬만한 집에 자가용 한 대씩 있고, 가전제품도 대충 갖추고 살고. 그런데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거죠. 노동자 입장에선 그게 다 빚이고, 빚도 못 낼 형편이면 기본생활도 보장되지 않는…. 제가 노동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지난 10년을 투쟁한 것도 결국은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던 거예요.”

정규직으로의 복직, 그거 하나만 보고 10년을 싸웠다. 하지만 돌아갈 공장은 이제 없다. 하여 이제는 새로운 운동의 전망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비정규 노동자의 집’을 떠올렸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여름방학 외갓집 같은 곳, 서울 도심에서 투쟁하는 비정규 노동자를 위한 쉼터를 만들어 보자고 뜻을 모았다. 기륭전자분회를 비롯해 비정규 노동자의 집 설립취지에 동감하는 활동가들이 힘을 합치기로 했다. 당초 10억원 설립기금 모금을 목표로 후원회원 모집에 나섰지만 역부족이다. 마음의 관심이 돈의 관심으로 표출될 때 비로소 주춧돌이 놓일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보일 때까지 온몸으로 보거라’ 백기완 선생님이 제게 해 주신 말씀이에요. 보일락 말락 하다가 기어이 눈이 어두워져, 눈을 감아도 보일 때까지 온몸으로 세상을 보라는 말씀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요….”

두 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이날 인터뷰가 끝나 갈 때쯤 유 분회장이 말끝을 흐린다.

“그런데요…. 인터뷰 기사에 비정규 노동자의 집 후원 계좌번호 넣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고딕체로 진하게 넣어 드릴게요.”


※ 비정규 노동자의 집
- 홈페이지 : laborhouse.kr
- 페이스북 : nodonghouse
- 후원계좌 : 국민은행(024801-04-403987)

구은회  press79@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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