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2000년 12월4일 새벽, 파업 집행부가 떠난 삼성동 한국전력 강당은 조합원들의 분노와 탄식, 그리고 좌절이 가득했다. 무대 위에는 격분한 조합원들이 던진 물병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망연자실한 조합원들은 강당을 떠나지 못하고 삼삼오오 모여 울분을 삭였다. 두 번의 파업선언과 철회, 그리고 마지막 12월3일 옥쇄를 각오한 조합원들의 민영화 저지투쟁 결과는 그렇게 패배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98년부터 2년여에 걸쳐 진행된 구조개편 저지투쟁이 패배로 끝나는 순간이었고,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빗장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조합원뿐만 아니라 투쟁의 대오에 함께 연대해 온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학생들에게조차 염치없고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외부세력 개입’ 운운하며 광범위한 연대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제대로 맞서지 않고 오히려 함께 투쟁해 온 학생들을 대오에서 분리함으로써 투쟁의 고립을 자초했다. 때문에 이날의 패배는 오롯이 전력노조만의 패배였지 신자유주의에 맞서 온 전체 노동자와 시민의 패배는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이 투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요인은 전력노조 내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쟁의 주체였던 전력노동자들이 내부 분열을 조기에 수습하지 못했고 이후 투쟁 과정에서도 지도부가 보인 전략과 전술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9년 12월 15대 국회 회기마감과 함께 전력산업 구조개편 관련 법률이 폐기되면서 정부가 강하게 추진했던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은 잠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전력노조는 이 시기 진영을 재정비하고 투쟁을 새롭게 다져야 했지만 상존해 있던 조직 내부 갈등이 표면화하면서 이후 투쟁에 대한 모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새로운 선거제도로 노조위원장이 선출됐지만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후유증이 장기화됐다. 집행부 교체로 이어지면서 내홍이 일단락됐지만 조직력의 상당한 손실은 피하지 못했다.

2000년 6월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구성된 전력노조 집행부는 오랫동안 전력노조 내부를 갈등으로 몰았던 대의원 간선제를 폐지하고 조합원 직선제를 도입했다. 당시 민영화와 구조조정 투쟁을 진행해 온 한국통신과 연대하면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 대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양대 노총이 연대하고, 시민·사회단체와 학생대오가 결합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한판 투쟁이 준비됐다. 사상 초유의 전력파업이라는 무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정부를 압박했고 전력산업 구조개편 관련 법률을 심의하는 국회에는 법안폐기를 촉구했다.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했으며 투쟁 일정이 속속 확정됐다. 지역 단위·전국 단위 투쟁결의대회가 조합원의 높은 참여로 고양됐고 파업 찬반투표는 90%에 달하는 찬성률을 보였다. 민영화 저지투쟁에 대한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국회의 법안심의 일정에 맞춰 두 번의 파업이 선언됐고 조합원들은 지역별 거점투쟁과 산개투쟁을 반복하면서 지도부 투쟁에 적극적으로 따랐다.

이에 따라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도 두 차례나 반복됐고, 두 번의 파업 연기 이후에는 법에도 없는 4일간의 중앙노동위 특별조정기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두 번의 파업연기로 현장 분위기는 상당 부분 침체될 수밖에 없었지만, 12월4일로 예고된 세 번째 파업투쟁 참여 열기는 여전히 높았다. 그해 12월3일 한전 본사 강당에 집결해 옥쇄투쟁을 각오한 3천여명의 발전지부 조합원과 전국적으로 산개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2만여명의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파업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부는 현장 조합원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중앙노동위 조정안을 수락하면서 사실상 파업철회를 선언했고, 민영화와 경쟁체제의 문을 여는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전력노조의 파업투쟁 실패는 곧 정부가 민영화와 경쟁체제 재편을 담은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추진하는 데 있어 장애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실제 당시 강하게 정책을 추진했던 집권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인 한나라당도 노조 반발을 의식해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해 왔지만 전력노조의 파업철회와 동시에 여야 합의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은 일사천리로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남은 과제는 분할과 민영화에 따른 전적과 고용조건이라는 제한된 범위의 노사 단체교섭만이 남았다. 발전부문 조합간부들로 구성된 단체교섭단이 7차례에 걸쳐 노사 간 교섭을 진행해 잠정합의안을 도출했지만 조합원들의 분노로 이마저 거부당했다.

2001년 4월2일 마침내 한전에서 발전부문이 분할됐다. 화력발전부문이 사용연료와 용량에 따라 5개 회사로 분할됐으며, 수력과 원자력 부문이 따로 하나의 회사로 분할됐다. 전력을 거래하기 위한 전력거래소가 설립됐으며, 전력산업 규제기관으로 전기위원회가 구성됐다.

2년여에 걸쳐 구조개편을 반대해 온 전력노조의 투쟁은 구조개편을 일정 부분 지연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막아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투쟁이 이후 발전노조의 38일간의 파업투쟁, 그리고 전력노조의 배전분할 저지투쟁을 이어 주는 핵심 동인이었다는 점에서 전력산업 정책의 전환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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