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국회의원선거는 더욱 그렇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노동자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친노동 후보들이 잇따라 출사표를 던졌다. <매일노동뉴스>가 '노동 호민관'을 자처하는 후보자들을 만나 그들의 고민과 비전, 포부를 들었다.<편집자>

 

▲ 조준호 후보 선거사무소

군산은 뼛속 깊이 뿌리내린 야당의 표밭이다. 제헌국회부터 지금까지 32명의 의원을 배출했는데, 보수정당 소속은 두세 명에 불과했다. 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진 16대 총선부터는 외사랑이다. 네 차례 연속 옛 민주당에 뿌리를 둔 제1 야당이 당선됐다.

그렇다면 야당은 군산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었을까. 4·13 총선에서 군산에 출사표를 던진 조준호(58·사진) 정의당 후보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조 후보는 "제1 야당에 대한 묻지마 투표가 오히려 군산을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적 충돌이 집약돼 있는 지역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의 목표는 야당이 취한 기계적인 행보를 뛰어넘는 것이다. 노동자·서민이 중심이 되는 제대로 된 진보정치를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다.

조 후보는 지난 26일 오후 전북 군산 공단대로 선거사무소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서해안 시대를 맞아 동쪽의 노동정치를 서해에 뿌리내리게 하는 교두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라진 노동자 대투쟁의 감동"

- 민주노총 위원장과 정의당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노동과 정치 영역에서 폭넓은 활동을 했는데 계기가 있었나.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이 컸다. 돌아가신 선친이 목자셨다. 민주·인권·통일운동을 하셨다. 군산 금광동에서 나고 자랐는데, 집에 항상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이 찾아들었다. 당시 빈민선교·민중예수 이런 말들이 종교계의 화두였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크면 빈민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강원도 철원에서 입대했다. 전역 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고민했다. 군인 시절 12·12 사건과 5·18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 민중과 노동자, 빈민을 위해 사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억압당하는 노동자가 사회의 주인이 돼야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 여겼다. 1981년 연말에 전역했는데, 이듬해 서울 영등포로 올라왔다. 조그마한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84년에 기아자동차의 전신인 기아산업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 이후 30년 이상 노동운동을 했다.”

조 후보의 선친은 고 조용술 목사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과 기독교농민회 전국연합회 이사장을 지냈다. 2004년 향년 84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평생을 노동자·빈민 인권향상 운동에 매진했다. 조 후보가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애쓴 것은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조 후보는 2006년 민주노총 6대 위원장을 역임했고, 정의당 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 노동운동을 하다 정치에 눈을 돌린 이유는.

“70년대 노동운동이 섬유 업종 여성노동자 위주였다면, 80년대 들어서는 자동차·조선 업종에 종사하는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중심에 섰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그 결실이다. 사업장 곳곳에 민주노조가 들어서고, 단기간에 내셔널센터가 조직됐다. 다른 나라가 놀랄 정도였다. 노조가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는 세력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실제 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90년대 구제금융 사태를 겪으며 노동자들의 성취가 희석되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들어 노동자 권리가 조금씩 뒤로 밀리더니 이명박 정부 이후 노골적으로 후퇴됐다. 노동운동만으로는 노동자 권리를 지키기 힘들어졌다.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정치가 노동자 삶을 좌지우지하게 만드는 핵심요소라고 판단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후보로 경기 화성갑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조 후보는 민주노동당 명맥을 이은 옛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2012년 발생한 비례대표 부정경선 논란을 조사하는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사건 조사가 끝난 뒤 중앙위원회에 혁신 결의안을 상정하려다 이를 제지하는 당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다. 그는 "제대로 된 노동자 정치참여 방안을 연구·지원하는 활동이 절실하다고 느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7월 노동정치연구소를 설립한 이유다. 현재 소장을 맡고 있다.

“안타깝지만 민주노동당은 실패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내부 분열 탓이다. 그렇다고 노동자가 중심이 된 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정치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비극이기 때문이다. 브라질 노동당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활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견제·긴장 없는 정치로 가라앉는 군산"

- 군산을 출마지로 선택한 배경은.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에 했던 파업과 관련한 재판이 이명박 정부 때 잇따랐다. 거기에 대응하느라 19대 총선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다 재작년부터 어머니 몸이 편찮으셔서 고향인 군산에 자주 오게 됐다. 여러 문제점이 보였다. 군산은 제1 야당의 지지세가 확실한 곳이다. 반면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와 쟁점이 집약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컨대 현대중공업 같은 대형사업장과 산업단지가 있는데도 공장가동률은 40%를 밑돈다. 지역경기가 죽어 있다. 일자리가 부족하다. 게다가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이를 밀어붙이려는 정부가 마찰을 빚는 지역이다. 미군부대가 있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새만금사업 환경오염 문제도 지역주민들에게 큰 스트레스다. 행정운영조차 매끄럽지 못하다. 군산시가 2011년부터 BTL(Build-Transfer-Lease) 방식으로 민간에 하수관거사업을 맡기고 있다. 20년간 2천억원 규모다. 그런데 부실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모두 견제와 긴장이 없는 정치가 빚은 문제다.”

-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추진할 것인가.

“현대·기아자동차가 차세대 생산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제4공장 설립지를 물색 중이다. 군산에는 새만금 방조제라는 땅이 있다. 대규모 시장인 중국 수출에도 용이하다. 자동차 생산 인프라도 구축돼 있다. 기업 투자를 유도하려면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정치권의 노력과 노동계 동의, 산업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그것이다. 기아차에서만 30년 이상 근무하고 있다. 내가 투자를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제4공장을 군산에 유치해 10조원 투자를 이끌어 내고 3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송전탑과 환경 문제가 커진 것은 군산지역에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일방통행을 막고, 중재에 나서 대화의 장을 마련하겠다. 양측이 납득할 만한 합의와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야권연대 생각 없다"

군산에는 현역인 김관영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은 예비후보들의 경선 요구를 마다하고 김윤태 고려대 교수를 전략공천했다. 선거전이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모두 민주당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시민들이 이번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로선 야권연대에 나서거나 응할 마음은 없다.”

- 최우선 입법과제는 뭐라고 보나.

“가장 중요한 사회·정치적 화두는 청년일자리다.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를 갖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사회에 희망이 생긴다. 정의당이 청년고용할당제를 공약했다. 공기업은 물론 300인 이상 민간기업에서도 매년 정원의 5%를 청년 중에서 의무적으로 뽑도록 하자는 것이다.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면 청년고용할당제 법제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

- 이번에 낙선하면 차기 총선에 다시 도전할 것인가.

“물론이다. 당선 여부를 떠나 나의 도전이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 즉 스스로 후보로 나서는 선거의 좋은 선례가 되길 바란다. 단병호·권영길 전 의원의 도전으로 동해에 노동정치가 발을 디딘 적이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조만간 서해안 시대가 열린다. 서해안에도 노동정치가 뿌리내리도록 기반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때까지 계속 문을 두드리겠다.”
 

조준호 후보는

- 1958년 전북 군산 금광동 출생
- 군산제일고등학교 졸업
- 전 민주노총 위원장
- 전 정의당 공동대표
- 전 문재인 대통령후보 공동선거대책본부장
- 현 노동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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