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현경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참터)

12월이면 서울광장은 하얀 스케이트장으로 변한다. 지난해 12월에는 예년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해 11월 시청광장에 한창 스케이트장 설치공사가 진행되던 그때, 스케이트장이 개장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노동자는 기본적인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한 노동현실에서 단지 노동권을 지키고자 했고, 단지 먹고살게 해 달라는 무방비 상태의 농민은 국민을 지켜 줘야 할 국가가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한 분노로 그렇게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보다 한참 전인 같은해 6월부터 서울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광고탑 위에 두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2014년 9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정규직 지위 인정’ 판결을 받은 기아자동차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은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기아차를 향해 2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높은 곳이라서 하나하나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백일이 넘는 시간을 한자리에서 어떤 마음으로 버텨 왔을까. 하루에도 수천번씩 일상으로, 보통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다. 노동자들이 왜 차가운 바닥에, 높은 광고탑에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내가 예전에 스케이트를 탔던 그 자리와 그 옆 광고탑에 두 노동자가 있는 두 장면이 겹치면서 ‘저분들이 내려오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이곳에서 웃으면서 스케이트를 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사라진 현실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3천3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싸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삼성전자는 수십명의 젊고 건강했던 노동자들의 사망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없이 형식적인 보상만을 내세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생명이 소중하듯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라앉는 배를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30일을 마지막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단지 국가가 직접 사형을 집행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노동자를 비롯한 수많은 국민 스스로가 생을 그만두게 만들고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테러를 방지하겠다며 국가비상사태 운운했지만, 테러로 생명을 잃은 국민보다 일상적인 노동환경에서 생명을 잃거나 노동이 힘들어서 스스로 삶을 그만두는 노동자들이 많은 이 상황에서 이미 발생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사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인권을 존중하라는 인권위 목소리는 들으면 좋고 안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권고의 대상이 돼 버렸다.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 달라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있지도 않은 경제의 발목을 잡는 답답한 소리가 돼 버렸다.

이러한 목소리는 특별한 삶이 아니라 보통의 삶을 살고자 하는 외침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달라는 간절함이다. 빼앗긴 인권을 되찾기 위한 목소리다. 점차 늘어만 가는 하루하루의 투쟁기간이 단지 할 일이 없어서,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 무의미하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강연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연대는 이름 한번 불러 주고 손 한번 잡아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이름을 불러 주고 손을 잡아 준다는 것은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모두의 삶에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잊어버리는 순간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아지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그냥 그대로 있게 될 것 같다. 우리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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