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진귀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상임자문위원

오늘로 한국노총은 창립 7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한국노총은 1961년에 설립됐으나 대한노총을 계승한 조직으로 스스로를 위상지웠기 때문에 70주년이 되는 것이다.

짧지 않은 역사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아픈 구석이 없을 수 없다. 조직이라는 것은 아무리 고매한 조직이라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청탁 모두가 공존하기 십상이지만 대중조직은 더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의 70년 중 40년은 독재체제 시기였고 현장의 힘이 취약한 시기였다. 다수의 노동사학자나 ‘민주노조’ 유파들이 한국노총에 대해 ‘어용’이니 ‘관변단체’니 하는 딱지를 붙였던 시기이기도 하고, 87년 노동자 대투쟁기에는 분열의 빌미가 되기도 한 시기다. 한국노총 간부들에게는 ‘가리고 싶은 낙인’일 수 있고, 열등의식을 일으키는 지점일 수도 있다.

필자는 한국노총의 역대 사업보고들을 세 차례 정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느낀 것은 한국노총에 붙여진 딱지들이 너무 과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들이었다. 사업보고서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때도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 종종 있었다.

이제 노조와 노조가 맞붙어 싸우던 질풍노도의 시기도 지났기 때문에 숨을 고르고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치 않겠는가 생각한다. 한국노총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과오에 대해서는 사과해야 하며, 반대로 사회변혁의 열망에서 한국노총에 그릇된 딱지를 붙였던 측에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과오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사과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흔히 얘기되듯이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노총은 당초 우익정치조직의 노동자조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조직이기 때문에 정치조직으로 남아서는 노동자 대중을 끌어들일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대한노총은 머지않아 강령 등에서 노동조합적 실체를 갖춰 나가고, 근대적 노동조합주의를 지향하는 혁신파 운동도 낳게 된다. 대한노총의 노동조합적 성향은 정부 수립 이후, 그리고 53년 노조법 제정 이후 강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노총의 문건 자료가 거의 없어 노동조합적 실체를 구체적으로 엿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추정해 볼 수 있는 편린들은 있다. 이승만의 지시로 5·1 노동절을 폐기하고 3·10 노동절을 기념하기 시작한 59년의 제1회 3·10 노동절 결의문을 보면 지금의 노동절 결의문과 비교해 별 차이가 없다.

50년대 말 발간된 대한노총 기관지들을 보면 대부분 노동조합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것은 선거 시기에 약간 나타나는 정도였다. 물론 현장의 힘이 아직 약하고 노동조합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조직으로 출범한 관성이 있고, 1인 독재체제가 노총을 정치조직으로 활용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에 정치조직적 속성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시기에도 한국노총은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를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군부정권이 공기업 보수통제, 현업공무원 노동운동 금지, 산별체제 약화 등 노조법 개악을 시도할 때 한국노총은 지금과 다를 바 없는 강도로 저지투쟁을 해서 관철시켰다. 총파업을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산별체제와 유니언숍제 등 제도를 획득함으로써 조직 확대·강화 기반을 구축했고, 60년대 내내 조직화운동을 정규적으로 추진해 목표의 92%를 달성했다. 그리고 단체협약 체결운동을 통해 50년대에 10%대였던 단체협약 체결률을 70년대 초반에는 80%대까지 끌어올렸다.

한국노총은 정권 지지로 획득한 활동 공간에서 노조운동의 기본 토대를 형성해 갔다고 할 수 있다. 노조운동의 기개를 세우려고도 했다. 한국노총은 1967년 대회에서 61년 재건조직 강령을 개정해 ‘군사혁명의 성스러운 봉화를 선두로’와 같은 조항을 삭제했고 ‘정치적 중립’을 ‘정치적 자주성’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는 한국노총에 커다란 시련을 안겨 줬다. 군부독재정권은 권력유지를 위해 민주화투쟁세력을 혹독히 탄압했고, 인권 및 노동기본권을 박탈했다. 한국노총에 대해서는 민주화투쟁에 역행하도록 강제했다. 한국노총은 국가보위체제를 지지하고 공장새마을운동과 유신체제를 홍보하는 전도사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됐다.

이런 일을 한국노총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관변단체' 충성심을 가지고 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노동기본권을 박탈하는 보위법에 대해서는 항의성명을 내려 했고, 국가보위체제의 단체협약 직권중재 지침에 대해서는 개선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리고 74년부터는 국보위체제 철폐를 요구했고, 정권에 굴종한 지도부를 끌어내리려 했다.

80년대 신군부체제하에서도 한국노총은 신군부의 임금억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임원을 비롯한 50여명이 한국은행 총재실에 쳐들어가 농성을 했다. 84년부터의 정치적 유화기에는 80년 말 단행된 기업별체제 강제입법을 철폐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입법투쟁에 들어갔다. 현장에 유입된 학생운동가들의 지도로 조직된 ‘민주노조’ 결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일상활동 측면에서는 노동운동의 여지가 협소해진 공간에서 정책역량 강화, 교육활동 확대, 자주복지활동 강화 등 대안적 활동을 강구했다. 임금 및 단체교섭 정책 체계화와 자주복지활동은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활동은 비록 ‘새마을교육’으로 추진하기는 했지만 간부육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물론 한국노총의 대응은 충분할 수 없었다. 70년대와 80년대의 군부독재정권 지지행위는 민주화투쟁에 역행한 중대한 역사적 과오였다. 그럼에도 한국노총의 정권지지행위만 드러내고 노동자 요구를 관철한 부분을 통편집해 버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다.

분명한 것은 한국노총이 변혁주의자의 관념 속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의 역사적 조건, 그 질곡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장의 힘이 절대적으로 취약하고 정권의 힘이 절대적으로 강했던 시기에 법내 노동자 대중조직으로 생존해야 했던 것이 한국노총의 처지였다. 한국노총이 아닌 다른 이름의 조직이었다 하더라도 법내 대중조직인 한 대동소이한 길을 갔지 않았겠는가 생각한다.

한국의 노조운동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같은 역사적 조건이 필요했다. 노동자 대투쟁을 맞이하면서 한국노총도 새로운 변화를 보여 주게 된다. 한국노총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25년간 7차례의 총파업과 40여회 이상의 대규모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역사적 조건은 계속 변화한다. 2000년대 들어 노조운동은 정치권력에 대해 그런대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날로 강화되는 시장권력과 그 배후에 있는 자본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대응을 하지 못했다. 노동자 대투쟁 이전의 노조운동이 정치권력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과 유사하다.

대한민국은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고 있고 그들의 처지는 별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기업규모 간 임금 및 복지격차도 노동자 대투쟁 이전처럼 계속 확대되고 있다. 노동자 간 연대를 갈수록 어렵게 하는 조건들이다. 노조의 힘도 약화·분산되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화가 임금노동자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 조직률이 20%에서 10%로 반토막 났다. 노조운동은 87년 체제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열정은 뜨겁지 않다.

정치권력에 대한 대응도 상당히 버거워지는 형국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런 정부, 저런 정부 가릴 것 없이 한국노총의 대표성을 점점 더 경시해 오고 있다. 지금은 벼랑 앞에까지 와 있다. 노조운동은 더 큰 위기의 터널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위기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87년 노동체제의 환상이 너무 달콤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노조운동은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소박한 마음으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조운동의 현실적인 힘인 파업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계급투표를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지 않는 한 상황 개선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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