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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노동조합은 무엇으로 사는가 ④] 청계피복노조 조직의 불안정과 취약성은 왜 생겼는가
   
▲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저자는 청계피복노조 조직력이 취약한 주된 이유로 이승철 인터뷰를 인용해 ‘밑에만 쑤시는 방식’으로 노동문제를 사회화시키는 방법으로 노동청·고용주에 압력을 가해 노조 요구사항을 관철시켰기 때문으로 봤다. 즉 전투적인 장외투쟁이 반복됐고, 1977년 9·9 결사투쟁을 기점으로 불안정해졌다고 했다.

또한 노조조직이 불안정한 이유로 최장집을 인용해 70년부터 청계피복노조 10년 역사에서 6명의 위원장이 들어설 정도로 지도부가 자주 교체됐다는 것을 들었다. 이처럼 잦은 리더십 교체와 불안정한 상태 지속은 집행부와 '유달리 투쟁적인 대의원들'의 기대치 간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철 인터뷰를 인용해 집행부를 불신임했던 근거 가운데 조합간부가 노동청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소주를 한잔 사 준 것이 들어 있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노동운동에서는 정부나 고용주측과는 접촉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선명성'이 과도하게 강조됐는데, 이것을 두고 이승철은 “중간이 없는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과연 맞는 말인가. 저자는 지식인들이 밑에만 쑤셔서 장외투쟁을 전투적으로 전개한 사례는 제시하지 못했다.

청계피복노조 조직력이 취약했던 이유

청계피복노조의 조직력이 취약한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업장 특성으로는 첫째 소규모 공장이 수백 개 산재해 있기 때문이며, 둘째 피복업체 작업 특성상 계절별로 사업장을 이동하기 때문이며, 셋째 객공과 같은 임금체계 때문이다.

노조조직 측면에서는 첫째 조합원들의 자체적 힘으로 노조를 창립하기보다는 전태일 사건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관심을 주된 힘으로 창립했다는 점, 둘째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 권리의식이 약한 점, 셋째 사업주의 노조가입 방해와 노조에 대한 악선전, 넷째 경찰·정보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이 있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조합원을 직종별·업종별·상가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조직하는 것을 시도했다. 노동자 권리의식을 고취시키고 사용주의 악선전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단축된 시간에 조합원을 교육시킴으로써 노동조합 의식을 강화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에 따라 75년 12월 농성을 통해 노동시간단축을 관철시켰다. 조합원 가입이 급격히 늘어났다.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조합원 의식이 향상됐다. 이 시기 왕성하게 노조활동을 하는 조합원이 많았다. 76년 4월 집행부가 바뀌고 노동교실 실장으로 이소선이 선임되면서 노동교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각종 모임과 교육이 활발해졌다. 저녁 퇴근시간 이후에는 노동교실이 조합원들로 붐벼 시끌벅적하고, 각종 소모임 활동이 활성화됐다. 조용함을 넘어 엄숙하기까지 했던 이전 노동교실 분위기와 달랐다.

장소가 부족해 인근 다방에 가서 모임을 할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에 크고 작은 사업장 문제를 조합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해결하는 풍토가 조성됐다. 77년 5월5일 발생한 와이셔츠업체 파업투쟁은 매우 성공적인 사례다. 뿐만 아니라 시장상가 내 노동자 고충처리에서 머물지 않고 보세가공업체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경인지역 민주노조들 간 연대·지원활동도 활발히 했다. 이렇게 나날이 조직이 강화되고 조합원 의식이 높아지자 정부 당국에서 이를 방해·탄압하려고 감시·미행·협박을 자행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정부 당국은 공권력으로 77년 7월 이소선 실장을 구속하고 노동교실을 강제로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전투적 장외투쟁이 반복돼 조직이 취약해졌다고 지적하면서도 장외투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이 국회 밖에서 투쟁하는 것을 일컬어 장외투쟁이라고 하는 말은 들어 봤어도 여기서 말하는 장외투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각자 자기가 속해 있는 공장 안에서만 투쟁해야 하는데 공장 문밖인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노동교실 아니면 노동청에 가서 민원을 호소하는 것을 장외투쟁으로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여타 사업장과 교류하고 연대·지원하는 것을 가리켜 장외투쟁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70년대에 자본과 권력은 노동자에게 기업별노조 이데올로기를 강요했었다. 다른 사업장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왜 너희 일도 아닌데 나서느냐’고 압박했다. 이에 기업별노조 틀에서 벗어나 전체 노동자 문제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려 했다.

하여튼 77년 9·9 결사투쟁은 조합원 교육과 조직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정부 당국이 공권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해 탄압하는 것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즉 조직이 취약한 원인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해 생긴 것이지 9·9 결사투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9·9 투쟁을 마치 지식인이 ‘밑에만 쑤셔서’ 투쟁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이승철은 인터뷰에서 “청계피복노조 정도의 규모라면 3천명은 동원돼야 조직력에 기반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며 “실제로 투쟁에 참가했던 인원은 노조 조직력의 한계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 공권력의 부당한 탄압을 이겨 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3천명을 동원해 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하든지 그것이 어렵다면 다른 방도를 세우기 위한 방침이나 결의가 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지도부는 공권력의 노조 탄압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오히려 이소선 노동교실 실장의 구속과 노동교실 강제폐쇄보다 미국노총의 초청을 받고 미국 가는 일에 골몰하는 듯했다. 지도부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한 중간간부와 조합원들이 직접 나서 투쟁을 조직하고 죽음으로 조직을 지키고자 했던 사건이 77년 9·9 노동교실 사건이었다.

정권 탄압에 지도부는 무대책

노조 지도부의 무대책에 실망해 중간간부와 조합원이 나서 투쟁을 조직하고 행동한 사건이 또 있다. 81년 1월30일 당시 신군부가 청계피복노조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처사에 맞서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아프리) 사무실에서 농성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80년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등장한 전두환 군부독재는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개 군인이 “청계노조는 노조도 아니야! 내가 없애 버리겠어” 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임현재 지부장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지금 투쟁하면 3년은 징역을 살아야 할 텐데 징역을 가지 말고 3년 징역 사는 마음으로 조직을 하자고 했다.

중간간부나 조합원들은 이것은 결국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직접 투쟁에 나섰다. 81년 1월30일 조합원들이 아프리에서 농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임현재 지부장은 1월30일 오후 아프리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최광석 기획관에게 아이들이 몰려가니 피하라고 이야기를 했다(81년 1월31일·2월25일 피의자신문조서). 방한한 모리스 파라디노 아프리 본부장은 약속을 취소하고 사무소에 오지 않았다(81년 1월31일 자술서). 그 시각 파라디노는 약속을 변경해 프라자호텔에 머물렀다.

조직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조직을 수호하고 전태일 정신과 청계노조 전통을 살려 나가기 위해 어린 조합원들이 절규하며 싸울 때 격려와 위로는 하지 못할망정 마치 지식인의 사주를 받아 부화뇌동함으로써 결국 조직이 취약해진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공권력의 불법 부당한 탄압이 가져온 결과를 오히려 뒤집어 말하는 것이다.

청계노조를 끝까지 지킨 것은 위기 상황에서 투쟁을 해 온 세력임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것이다. 80년대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고 청계노조의 법통과 전태일 정신을 이어 나간 세력은 바로 이들이었다. 투쟁의 진실을 왜곡한 사람들이 80년대에 손 털고 노동운동을 청산했을 때 이들은 온갖 탄압을 뚫고 청계노조를 지키고 청계노조의 정신적·물적 토대를 마련했다.

다음으로 최장집을 인용해 “잦은 리더십 교체와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된 것이 집행부와 ‘유달리 투쟁적인 대의원들’의 기대치 간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한 것에 대해 짚어 보자.

70년대 청계피복노조 10년 역사에서 지부장을 했던 사람은 김성길·구건회·최종인·최일호·이승철·양승조·김영문·임현재다. 총 8명이다. 김성길·구건회·최일호는 한국노총이나 연합노조 등 상급단체를 통해 온 사람들이다. 나머지 5명은 전태일 생전에 전태일과 함께 삼동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양승조의 경우 삼동회 회원은 아니지만 삼동회 회원들과 친구다.

지도부 교체의 성격은 76년 4월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주도세력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노조 운영과 실무 경험이 부족해 상급단체에서 파견된 간부들한테 운영과 실무를 배우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현장 경험이 다르고 정서적으로 다른 데서 오는 갈등이 있을 수 있었다. 여기에 정보기관에서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공작이 했을 수 있다. 따라서 조직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5년이 약간 넘는 동안 지부장이 4번이나 교체된 것을 보더라도 조직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알 수 있다. 2개월 만에 지부장이 바뀌기도 하고 교체된 지부장이 다시 지부장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때의 조직 불안정은 경험 미숙과 정보기관의 분열 조장에서 비롯한 내부 갈등이 지배적 요소였다.

지부장 교체=세력 교체

그러나 76년 4월16일 지부장 교체는 양상이 달랐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75년 추모의 밤 개최, 노동시간단축에 이은 임금인상 투쟁을 주도했던 신진세력의 등장에 따른 지도부 교체였던 것이다. 신진세력은 77년 봄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이승철 지부장을 불신임했다.

이승철은 인터뷰를 통해 “노동청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소주를 한잔 사 준 것이 들어 있기도 했다”며 “당시 노동운동 내에는 정부나 고용주측과는 접촉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선명성이 과도하게 강조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엽 말단적인 이유다. 근본적인 이유는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분출되는 요구와 투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수용하고 더 큰 힘으로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조합원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를 받아 그것을 투쟁으로 이끌고 그 투쟁을 통해 조합원 의식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조합원 대중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합원의 투쟁을 지식인 사주를 받아 집행부 흔들기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

일례를 들자면 9·9 투쟁이 벌어지던 시점인 76년과 77년 사이는 남북 간 당국자회담이 전개되고 있었다.

"회담 당시 북한 관계자들은 남한에 가면 반드시 평화시장에 오겠다고 해서, 남한 정부는 '북한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청계피복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이에 청계피복노조 내부에는 '(투쟁)하면 이긴다'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러한 노조의 공격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정부는 '도저히 청계피복노조를 이렇게 놓아 두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이승철 인터뷰)는 주장도,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입장이 나뉠 것이다.

정보 당국의 이런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이 들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청계노조와 하등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청계노조의 활동을 북한과 연계시켜 압박하려는 술책으로 받아들이는 입장도 있다. 반면 정보 당국의 근거도 명확하지 않는 정보를 의심 없이 믿고 위축돼 조합활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76년 일괄 사퇴했던 세력은 이듬해 9·9 사건으로 조합원 5명이 구속되고 수배·구류·해고로 노조 힘이 약화됐을 때인 78년에 집행부 퇴진을 요구했다. 그들은 집행부가 너무 투쟁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유인물로 지부장을 인신공격하기도 했다.

엄청난 상처를 남긴 조직분규 결과 78년 9월27일 김영문이 지부장이 됐다. 김영문 지부장 선출은 임현재를 지부장으로 만들기 위한 전 단계였다. 당시 임현재는 조합원 자격이 없는 사용주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시 노동조합법(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직접 노사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조합원 자격이 있는 김영문을 우선 지부장으로 뽑고 임현재는 그동안 취직을 해서 조합원 자격을 취득하기로 한 것이다. 임현재는 79년 3월14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지부장으로 선출됐다.

임현재가 지부장이 된 이후 지부장과 지부 고문인 이소선과의 갈등이 대단히 심했다. 임현재 지부장은 투쟁적인 조합간부들을 해임·퇴출시키고 자신의 세력으로 배치하려 했다. 이소선은 이에 반발해 심하게 다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청계피복노조 10년 역사에서 지부장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10년 동안 삼동회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지부장을 하거나 권력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태일의 친구라는 명분과 그로 인해 형성된 권위주의·남성우월주의가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조 10년간 조직이 불안정한 상태를 지속한 것을 두고 집행부와 ‘유달리 투쟁적인 대의원들’의 기대치 간극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민종덕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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