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에는 시민호민관이라는 독특한 옴부즈맨 제도가 있다. 옴부즈맨 제도라는 게 일종의 민원조사관인데, 시흥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호민관이 상근하면서 독임제로 운영한다. 비상근에 합의제로 운영하는 다른 지자체 옴부즈맨 제도와는 권한·책임 수준이 비할 바가 아니다. 초대 시흥시 호민관을 지낸 임유씨는 “약자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그나마 균형추가 맞다”고 말한다. 그가 호민관 시절 보고 듣고 만난 시민들의 얘기를 <시민은 억울하다>(한울)는 책으로 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부 내용을 발췌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게재한다.<편집자>


자초지종

칠순이 넘은 노인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하마터면 목숨도 잃을 뻔한 큰 사고였다. 잡초를 베다 웅덩이에 빠져 그리됐다. 요샛말로 하면 ‘싱크홀(sink hole)’ 사고인 셈인데, 노인은 도대체 무슨 연유로 밭 한가운데에 사람이 빠질 정도의 큰 웅덩이가 생겼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서울처럼 근처에 지하철 공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원인은 너무도 쉽게 규명됐다. 노인의 밭과 옆집 논 사이로 흐르는 배수로가 범인이었다. 배수로 하단부 콘크리트 벽의 파손으로 생긴 틈 사이로 토사가 유출됐는데 이로 인해 상층 표면의 지반이 함몰돼 웅덩이가 생긴 것이다.

노옹은 그 나이 노인들과는 사뭇 다른 합리적인 품성을 갖고 있었다. ‘건수 하나 잡으면 팔자를 고치려 드는’ 부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라 소유인 배수로가 부실해 웅덩이가 파였고, 그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으니 나라가 보상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건 필요 없고, 치료비하고 한 달치 제 급료(아파트 경비 일을 쉬어야 했다!)만 주면 됩니다.” 노인의 요구는 이처럼 지나칠 만큼 소박(?)했는데 시의 대응은 형식적이었다. “배수로가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시로서는 병원비 외에 달리 보상할 방도가 없습니다. 다른 부분은 소송을 통해서 해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국가배상법에 따라 배상을 받으시는 방법도 있는데, 그러려면 여기에 서명하시고 신청 서류를 제출하셔야 합니다.” 말은 그럴싸했지만 결국 누군가의 ‘결정’을 받아오라는 얘기였다. “돈 100만원 남짓 벌어 근근이 한 달 사는 노인한테, 그것도 갈비뼈가 부러져 거동이 편치 않은 환자더러 법원이 있는 안산까지 가서 서류를 내고 또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배상 결정을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예의 차려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다고, 대답은 늘 이런 식이라고, 노옹은 이제껏 참았던 분노를 일거에 터뜨렸다.

배수로 관할 논쟁으로 비화하다

김제평야 정도는 아니지만, 서울 근교에서는 제법 명성이 자자한 호조벌의 위용이 저만치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 지점은 호조벌의 초입이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바둑판 모양으로 길게 늘어진 황금 들판은 보이지 않고 대신 각기 키 높이가 다른 다양한 밭작물들만 무질서하게 엉켜 있었다. 시 주요 도로변에 위치한 탓에 땅값이 비싸기도 하고 ‘언젠가’ 있을 형질변경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논보단 밭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논을 갈아엎고 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노옹의 밭을 경계로 사실상 호조벌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배수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노옹의 밭을 기준으로 배수로 양쪽의 ‘뷰’가 확연히 달랐다. ‘제대로’ 된 U자형 배수로가 설치돼 있는 오른쪽과 달리 왼쪽은 그냥 ‘허술하고 낡아’ 보였다. 의문이 금세 풀렸다.

“저~쪽부터는 농어촌기반공사에서 관리하는 배수로입니다. 공사도 거기서 했고요.” 앞에서 말한 U자형 배수로를 가리키며, 조사를 돕기 위해 나와 있던 생명농업기술센터 직원은 배수로 관할권으로 얘기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고가 난 이곳 배수로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구거(도랑)기 때문에 아마도 하천을 관리하는 부서가 공사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는 농어촌정비법에 따라 만들어진 농업기반시설이고, 다른 하나는 소하천정비법에 따라 정비된 자연 구거기 때문에 관리 부서도 달라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배수로는 한 길로 흐르는데, 공사 주체가 달랐다는 얘기였다. 확인이 필요했다.

“여기 지적도를 한번 보십시오. 이곳 배수로는 농림부 땅입니다. 소하천구역으로 지정된 바도 없고요. 저희가 공사한 게 아닌데, 왜 관리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까.” 하천을 담당한다는 공무원 얘기는 또 정반대였다. 노옹뿐 아니라 마을 주민 모두가 한목소리로 “시에서 공사를 했고 보강 공사를 하는 것도 봤다”라고 하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콘크리트는 보이는데 아무도 공사하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맞네, 네가 맞네 하며 옥신각신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쟁점이 뒤로 밀려 버렸다. “왜 직접 배상은 안 되느냐” 하는 논점 말이다. 그런데 다들 관리 책임을 놓고 싸우는 걸 보니 누가 됐든 ‘시에 책임이 있다’는 것만큼은 인정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노옹이 배수로 관리를 잘못한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잘잘못의 소재를 다툴 이유가 없었다. 중재에 나섰다.

의견 표명서 ‘전문’

국가배상법에 따른 손해배상의 경우 소송을 통하거나 배상심의회에 배상을 신청함으로써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지만, 이 경우 최소 4주 이상의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민원인은,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경비 일을 통해 생계를 꾸리고 있던 상황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최근 경비 일까지 그만두게 돼 100만원 남짓의 월급마저 받을 수 없게 됐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법적 구제 절차를 따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시의 긴급 구제 제도를 통해서라도 생계 지원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지만, 지원 자격 등의 문제로 이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피해 구제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민원인은 국가배상법 제3조제2항에 명시된 손해배상 기준인 요양비와 휴업 배상금 그리고 장해 배상금 중에서 치료에 들어간 실비와 휴업 배상만을 요구하는 등 합리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배상금에 대한 최종 합의가 필요하지만, 현재까지 민원인이 요구하는 배상액 수준이 매우 낮아 시의 판단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더라도 규모와 기준 등의 적정성을 대외에 소명하는 데에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민원인이 소송 등의 법적 구제 절차를 밟을 경우 시는 이보다 많은 배상금을 지급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① 민원인의 부상에 대한 시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며 ② 부상으로 인해 최근 민원인이 실직했고 이로 인해 생계가 곤란해지는 등 피해 구제가 시급하며 ③ 배상금 요구 수준도 사회 통념에 비해 과도하지 않은바, 배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원칙 아래 배상금 지급 규모 등에 대해 민원인과 협의를 시작할 것을 주문합니다.

결론은 해피엔딩으로

웅덩이가 위치한 땅의 소유주가 농림부고 배수로 정비 공사도 생명농업기술센터에서 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소한 관리 책임만이라도 생명농업기술센터가 져야 할 것 같았다. 노옹과 당장 협의에 나서라 주문했는데…. 여전히 변명과 '핑퐁'만 계속됐다. 답답했다. 내가 고충민원을 제기할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행정과로 이첩을 결정했다. 부서를 특정할 수 없으니 사무분장 조례에 따라 행정과가 맡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고육지책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가. 시가 갑(?)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농어촌공사가 웬일로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꼬인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팔목을 꺾은 것이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 달치 월급 150만원과 병원비 25만원, 도합 175만원이 노옹에게 지급되는 것으로 ‘웅덩이를 품은 배수로 사건’이 막을 내렸다.

“호민관 덕분에 신속히 배상을 받아 정상 생활로 빠르게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호민관 출범 1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홍보용 동영상에 출연한 노옹이 남긴 멘트, 민망했지만 깁스를 푼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고맙고 흐뭇했다.



[국가배상법 제5조]

도로·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營造物)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瑕疵)가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했을 때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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