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증권으로부터 면직통보를 받고 해고된 이남현(사진 가운데) 사무금융노조 대신증권지부장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본사 앞 농성에 돌입했다. 사무금융노조

사무금융노조 현대라이프생명보험지부가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본사 앞에서 ‘현대라이프생명 부당노동행위 규탄 및 직원퇴출프로그램 저지 결의대회’를 마친 뒤 대주주인 현대카드 본사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무금융노조

"어, 춥다."

사무금융노조 조끼를 입은 한 조합원이 진저리를 쳤다.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본사 앞에서 볕을 보기란 쉽지 않다. 건물이 해를 가려 늘 그늘이 넓게 드리워져 있다. 가만히 서 있어도 한기가 서리는 대신증권 황소상 앞에 28일 돗자리가 깔렸다. 그 앞에 양복 입은 사내가 앉았다. 대신증권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남자 1호, 이남현 사무금융노조 대신증권지부장이다.

사무금융노조 '1호 해고자'

대신증권은 전날 "이남현 지부장의 소명에서 징계수위를 바꿀 만한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며 인사위원회 개최 하루 만에 면직을 통보했다.

대신증권이 밝힌 징계사유는 허위사실 유포와 회사 명예훼손이다.

하지만 대신증권이 창조컨설팅과 손잡고 만든 저성과자 퇴출프로그램인 전략적 성과관리체계를 폭로한 '괘씸죄'가 크다.

이 지부장은 "직원들을 면담하고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회사에 질의한 게 허위사실 유포라면 모든 직원들이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끝 모를 장기전에 돌입한 그는 "노조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회사를 바로잡을 때까지 지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합원들은 지부 카페에 "대한민국이 헬조선이 되더니 대신증권도 헬대신이 됐다"고 한탄하거나 "조합비를 냈다" 혹은 "노조가입을 권유하겠다"는 글로 지지를 표시했다.

오병화 대신증권지부 사무국장은 "이번 사태로 노조탄압·쉬운해고는 곧 대신증권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며 어처구니없어했다.

정현철 사무금융노조 조직국장은 이날 오전 열린 대신증권 규탄투쟁 선포식에서 "이남현 지부장은 사무금융노조 설립 4년 만에 처음 나온 1호 해고자"라고 소개했다.

그만큼 노조에서도 대신증권 사태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정 국장은 "양홍석 사장이 오판을 했다"며 "당장 이남현 지부장 한 명을 내쳤으니 편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지긋지긋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날 투쟁선포식에는 노조 산하 지부 대표자와 간부를 비롯한 80여명이 함께했다. 586일 동안 파업을 벌인 경험이 있는 김호열 골든브릿지투자증권지부장은 "해고자 한 명을 복직시키는 투쟁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증권이 해고한 건 이남현 지부장 한 명이 아닙니다. 노조를 해고했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을 해고했고,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를 해고했습니다. 노조활동을 했다고 노동기본권이 백주에 말살되는 노동현실을 우리가 함께 깹시다."

"노조탄압 정점에 대신증권·HMC투자증권 있다"

이남현 지부장이 겪고 있는 '고난의 행군'을 남 일 같지 않게 보는 바라보는 사람이 또 있다. 노명래 HMC투자증권지부장이다. 노 지부장은 "내가 1호 해고자가 될 수 있었는데 선수를 뺏겼다"며 "곧 2호 해고자 가 될 것 같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노조탄압의 왼쪽에 대신증권이 있다면 오른쪽에는 HMC투자증권이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HMC투자증권에는 지난해 4월 지부가 설립됐다.

HMC투자증권의 부당노동행위는 지부가 설립된 직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합원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거나 "강제발령을 내겠다"며 노조탈퇴를 강요한 것은 약과다.

회사는 그해 7월 253명을 희망퇴직 방식으로 내보내고, 38곳의 지점을 15곳으로 반토막 냈다. 희망퇴직 거부자와 노조 조합원들을 회사의 '아오지'로 불리는 ODS(방문판매부서)로 발령했다. 아이패드 하나 쥐어 주고 불가능한 증권 판매목표를 내준 뒤 현장을 돌게 했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했지만 시정되지 않고 있다. 회사는 행정소송을 냈다. 끝까지 가겠다는 의미다.

1월에는 D등급 저성과자에 대해 복지혜택을 제한하는 내용의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을 했다. 올해 D등급을 받은 3명은 노명래 지부장을 비롯한 지부 간부들이다.

노 지부장은 "니네들도 노조하면 저성과자로 만들어 버리고, 의료비나 학자금 같은 복지혜택을 주지 않겠다고 직원들에게 보여 준 것이나 다름없다"며 "노조말살의 최정점에 대신증권과 HMC가 서 있다"고 씁쓸해했다.

"귀하는 잉여인력…" 엉뚱한 부서에 배치한 현대라이프생명

찬바람이 불고 있는 건 증권업계뿐만이 아니다. 생명·손해보험업계도 퇴출프로그램에 몸살을 앓고 있다. 대신증권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현대라이프생명 앞에서도 비슷한 시각 손피켓을 든 노동자들이 결의대회를 열고 현대라이프생명을 비판했다.

"당신은 잉여인력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갱생 기회를 준 거라고 합디다. 이건 인사권 남발도 아닌 인권유린입니다!"

현대라이프생명이 올해 7월 실시한 희망퇴직을 거부했다가 하루아침에 영업부서에서 상품개발팀으로 발령이 난 최진(50)씨는 자신을 잉여인력으로 분류한 회사 이메일을 받았던 그날을 잊지 못했다.

인사팀장 명의로 발송된 이메일은 "귀하께서는 전 소속부서에서 잉여인력으로 분류되어 직급에 맞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부여 차원에서 이동발령됐다"고 알려 왔다.

현대라이프생명은 최씨를 포함해 녹십자생명 출신 희망퇴직 거부 직원 27명을 1~2차에 걸쳐 관리역과 특수보직에 배치했다. 십수년간 해 오던 일이 아닌 전혀 생소한 업무를 부여받은 직원들은 매일 평가를 받으며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최씨는 "상품개발팀장이 '이 일은 5년 정도는 배워야 할 수 있다'고 했다"며 "5년 동안 다녀서 반드시 업무를 배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우상범(51)씨는 95년부터 지금까지 영업맨으로 살다가 이번에 IT부서로 배치됐다. 희망퇴직을 거부하면서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IT부서는 황당 그 자체였다.

"27년 동안 전산실에서 일하는 와이프도 제가 받아 온 프로그램 과제를 못 풀더라구요. 그러니 제가 IT부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씨는 "후배와 동료들을 위해 끝까지 버티고 견디겠다"고 말했다. 그는 "영업점에 두고 단돈 10원이라도 영업성과를 올리게 하면 회사에 득이 될 텐데 왜 이렇게 가혹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영업현장으로 복귀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현대라이프생명 관계자는 "현대라이프생명에 직원퇴출프로그램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무금융노조 '쉬운 해고' 저지 총력투쟁

사무금융노조는 일부 사업장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해고·퇴출 바람이 정부가 추진하는 저성과자 일반해고 가이드라인과 맞물려 사무금융업계 전반으로 노조 탄압과 '쉬운 해고'가 확산될까 우려하고 있다.

김금숙 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자본은 20년 넘게 회사를 위해 몸 바쳐 일한 노동자들에게 잉여인력 낙인을 찍고 나가라고 한다"며 "특정산업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옆에 있는 동료들이 저성과자로 찍혀 혼자 죽게 내버려 두지 말자"며 "11월4일 오후 사무금융노조 투쟁문화제와 같은달 14일 민중총궐기에서 사무금융노동자들의 힘을 보여 주자"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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