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수 축구평론가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영국 총선이 초접전 박빙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당수의 참패로 끝났다. 19세기 중엽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이후 역대 두 번째, 그리고 노동당 출신으로는 최초가 되는, 유대인 총리 시대가 열리는가 했더니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의 시대가 더 연장됐다.

이 글이 승자 캐러먼 대신 패자 밀리밴드를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사상적 배경과 그들의 축구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에드 밀리밴드는 1969년 런던 유대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 데이비드와 더불어 형제가 영국 정가의 중심 인물이지만 실은 그들의 아버지가 더 유명하다. 세계적인 좌파 정치학자 랄프 밀리밴드가 그 사람이다. 원래 네덜란드에서 살았는데 일가친척 60여명이 희생을 당한 히틀러 나치즘의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를 피해 간신히 영국에 정착한 인물이다.

천신만고 끝에 영국에 정착한 랄프 밀리밴드는 20세기 중엽, 그러니까 영미의 질주하는 자본주의 국가와 스탈린·마오쩌둥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 그 본질을 파헤치는 대논쟁, 즉 ‘국가 논쟁’을 주도했다. 그의 아내 매리언 코작도 인권운동가이자 핵무장 반대 운동 단체 CND를 이끌었다. 급진 사상가를 부모로 둔 밀리밴드 형제는 90년대를 전후해 영국 노동당의 핵심 정치인으로 부상했고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시대에 장관으로 활동했다. 2010년 총선 참패로 노동당의 진로가 불투명한 가운데 형과 동생은 당수 선거에 나란히 출마해 경쟁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동생 에드가 형 데이비드를 막판 역전으로 이겼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 집안 사람들이 열혈 축구광이라는 점이다. 웬만한 좌파 사상가들은 축구와 같은 스포츠 열기가 시민·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잠식할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들은 영국 사람들이기에 기본적으로 축구를 사랑했고 더욱이 정치인들이었기에 축구장에 넘쳐나는 대중의 열기를 적극 옹호하고 존중했다. 동생 에드 역시 축구광이었지만 특히 형 데이비드는 한때 기성용이 뛰었던 선덜랜드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바로 그 얘기를 해 보자. 선덜랜드는 영국 동쪽 타인위어주 도시다. 우리나라로 치면 태백산맥의 동쪽 지방이다. 태백산맥에 탄광업이 발전했듯이 17세기 이후 선덜랜드 역시 석탄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항구를 끼고 있기 때문에 채탄뿐만 아니라 석탄 수출 및 조선 선박의 중심지가 됐다.

선덜랜드의 홈구장 이름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Stadium of Light)다. 97년 신축 개장한 아름다운 경기장으로 4만9천석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기장 이름이다. 영국의 경기장들은 오랜 지역사를 반영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은 바로 같은 이름의 지역을 그대로 딴 것이다. 그런데 몇몇 구단들은 막대한 건설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경기장 이름을 거액에 팔기도 했다. 런던의 아스널 홈구장은 에미리츠 스타디움인데 이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항공사 이름을 딴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그 유명한 아랍에미리트의 왕족이자 세계적인 부호인 만수르의 에티하드 항공사에 이름을 판 것이다. 독일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 역시 거대 보험회사로부터 비용을 조달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선덜랜드의 홈구장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다. 여기서 ‘라이트’는 물론 단순히 번역하면 ‘빛’이지만, 그 뜻은 각별하다. 단순한 빛이 아니라 진짜 어둠을 밝히는 빛, 엄청난 고통을 견디게 해 주는 빛, 죽음을 동반한 노동을 지켜 주는 빛을 의미한다. 선덜랜드의 광산노동자들이 채탄을 하기 위해 갱도로 들어갈 때 그들의 노동을 보호해 주고 그들의 목숨을 지켜 주는 컴컴한 갱도 속의 랜턴을 뜻한다.

노동의 도시, 광산노동의 도시, 항만노동의 도시 선덜랜드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삶을 존중하는지 바로 이 ‘빛’, 즉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라는 명칭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장 출입구에는 늠름한 광부와 그 아내와 아이를 기념하는 조각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자신들이 노동자의 자식임을, 고결한 노동에 의해 살아가는 도시임을 선덜랜드 사람들은 잊지 않고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적인 구단의 부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밀리밴드가 과감히 사표를 던진 일이 있다. 2013년 4월의 일이다. 사태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당시 선덜랜드는 연전연패로 리그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구단이 이탈리아의 파올로 디 카니오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디 카니오는 현역 시절에나, 감독으로 변신했을 때나 거침없이 인종차별 발언을 했던 파시스트였다. 본인은 여러 차례 부정하거나 변명하긴 했지만, 그는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추종했다. 2005년 이탈리아 라치오에서 뛸 때는 경기장 안에서 경기 중에 오른팔을 쭉 뻗어 올리는 나치식 경례를 한 적도 있다. 이탈리아를 파시즘 광기로 몰고 간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 "고결한 목표와 강건한 신념을 지녔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도 있다.

그런 극우적 신념을 가진 디 카니오가 광산과 항만의 도시 선덜랜드의 감독으로 온다고 하자 대다수 선덜랜드 팬들은 강력하게 항의했고 데이비드 밀리밴드 부회장은 항의의 뜻으로 사표까지 던졌던 것이다.

게다가 선덜랜드는 영국 노동운동사와 축구사의 일획을 그은 도시다. 80년대 당시 보수당 마거릿 대처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엄청난 정리해고와 무자비한 억압이 자행될 때 선덜랜드의 노동자들이 길고도 질긴 저항에 돌입했다. 이때 선덜랜드 구단의 선수와 감독과 구단 임직원들은 파업과 저항을 지지하며 연대시위에 동참했다.

대처는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뿐만 아니라 매스미디어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폭력배처럼 묘사했고 축구장의 팬들을 훌리건으로 취급했다. 대처 스스로도 이들을 ‘문명사회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을 잠시나마 이겨 내기 위해서나 파업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축구장에 몰려든 노동자들의 거친 함성은 폭력이 아니라 절규였다. <빌리 엘리어트> <풀 몬티>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내비게이터> 같은 영화들이 이 시절의 시련을 장엄하게 다뤘다.

선덜랜드 선수들과 감독과 임직원들은 자신들의 팬들이 마거릿 대처의 미디어에 의해 폭력배로 모욕을 당하는 것에 울분을 표했고 비정한 정리해고에 거리로 쫓겨나온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함께 연대시위를 했다. 그러한 행렬에 데이비드 형제들이 있었고 훗날 영국 노동당을 이끄는 정치인이 됐다. 비록 이번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말이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