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 오키나와 전투 당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2년 조성된 평화기념공원. 공원에는 희생자 20만명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색 위령비가 부채꼴 모양으로 끝없이 세워져 있다. 조선인 313명의 이름도 기록돼 있다. 김봉석 기자

1945년 4월1일 미군 주력부대 6만명이 일본 오키나와섬 중간쯤에 위치한 가데나만에 상륙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전쟁 최후 격전이 펼쳐진 오키나와 전투의 서막이었다. 오키나와는 유일하게 일본 본토에서 지상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군인과 민간인 20만명이 숨졌다. 일본군은 9만4천136명이 죽거나 다쳤고, 미군 사상자도 1만2천520명이나 됐다. 민간인 피해도 극심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57만명)의 4분의 1인 1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이 쏟아부은 포탄은 271만6천691발. 오키나와현민 1명당 472발의 포탄이 사용된 셈이다.

미군은 처음 상륙했던 가데나만 인근 두 곳에 군 비행장을 지었다. 동북아시아 미군기지 최대 거점으로 불리는 가데나 공군기지와 후텐마 해병기지(비행장)가 바로 그곳이다. 기지는 또 다른 전쟁의 씨앗이 됐다. 70년이 지난 2015년 4월 현재도 아베 정부와 오키나와현 지방정부·현민들은 후텐마기지 이전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 옛 일본해군참모부 참호 위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를 살펴볼 수 있는 사진·그림·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김봉석 기자


평화로운 동양의 하와이 오키나와

햇볕은 따뜻했다. 평균 기온 10도 안팎을 맴도는 한국과는 달랐다. 3월 말 오키나와의 한낮 기온은 20도를 웃돌았다. 한없이 펼쳐진 푸른빛 바다가 내다보이는 거리를 사람들은 반소매 차림으로 한가롭게 거닐었다.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는 휴양지 오키나와.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지난달 31일 한국노총 공공노련(위원장 김주영)과 의료산업노련(위원장 이수진) 소속 단위노조 위원장·간부 42명이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여행사업단 ‘더하기 휴’와 함께 오키나와로 평화기행을 떠났다. 이들은 3박4일 동안 2차 세계대전 격전지와 전쟁 이후 섬 곳곳에 세워진 추모비, 평화공원을 둘러보고 현민들과 미군기지 이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평화기행단이 오키나와에 도착해 처음 방문한 곳은 태평양전쟁 당시 구축된 일본 해군참모부 참호였다. 오키나와 남부 해안선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동산에 일본군은 450미터 길이의 참호를 팠다. 일본군 4천명이 주둔했다. 2천400여명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전사했다.

지금은 참호 일부만 공개돼 있다. 사령관실과 의료실·발전실까지 갖췄다. 당시 유적을 담은 박물관도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던 오타 미노루 해군 소장의 모습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물관 경비를 서던 머리 희끗한 일본인이 다가와 짧은 영어로 “한국인이냐”(South Korean?)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했더니 환영한다고 “Welcome, Welcome”을 연신 외쳤다.

관광객의 발걸음이 쉽게 닿지 않는 참호에 한국인들이 방문했다는 게 그에게는 매우 기쁘고 반가운 일인 듯했다.

오키나와섬 면적의 20%가 미군기지

그렇게 오키나와는 전쟁의 역사를 품고 있다. 휴양지라는 화려한 모습 뒤에는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지금은 주일미군의 74%가 주둔한 곳이다. 오키나와섬 면적의 20%를 미군이 군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주일미군 전체 규모는 3만7천600명으로, 우리나라(2만8천500명)보다 많다.

서승 리츠메이칸대 특임교수(법학과)는 “오키나와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미군의 전쟁기지나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인권·평화 운동가인 서 교수는 평화기행 가이드를 자처해 기행단과 3박4일을 함께했다.

오키나와는 길이 108킬로미터, 너비 3~16킬로미터로 남태평양상에 길쭉하게 뻗어 있는 섬이다. 본섬 면적은 1천207제곱킬로미터로 제주도(1천833제곱킬로미터)보다 작다. 북위 28.5도(섬 중앙 기준)에 위치해 제주도(북위 38도)보다 남쪽에 있다. 제주도와는 7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일본 남부에 위치한 규슈에서도 바다로 685킬로미터나 더 내려가야 오키나와에 닿는다. 일본 본토와는 꽤 멀다.

오키나와는 1870년까지 류큐왕국으로 불리던 독립국이었다. 1872~1879년 사이 일본에 병합됐다. 그리고 불과 60년 뒤 오키나와 전투를 겪었다. 일본이 미군에 항복한 45년부터 72년까지 27년간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다. 72년 5월 미국이 일본에 오키나와를 반환할 때까지 이 땅은 일본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서 교수는 “일왕이 전쟁에 패한 후 자신과 일본 본토의 안전보장을 위해 미군에 오키나와를 넘겨줬다”며 “이러한 역사로 인해 오키나와 현민들은 일본 본토에 대한 불신과 피해의식이 깊다”고 말했다.

오키나와는 그렇게 류큐왕국 문화에 미국·일본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오키나와 최대 번화가이자 관광거리는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있는 국제거리다. 국제거리라는 이름은 미군이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직선도로를 뚫고 미국인들이 자주 왕래하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 미해병항공단이 주둔한 후텐마기지는 오키나와 기노완시 면적의 25%를 차지한다. 도심 한복판에 군 기지가 자리 잡고 있다. 기지 인근 카카즈공원에 오르면 미군의 수직이착륙기인 오스프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뜨고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김봉석 기자


“미군기지 용납 못해” 평화운동 나선 현민들

최근 오키나와의 최대 현안은 후텐마 미국 해병기지(비행장) 이전 문제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남쪽 기노완시에 있는 후텐마기지를 섬 북쪽 나고시 헤노코 연안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후텐마기지의 면적은 4.8제곱킬로미터로, 기노완시 전체 면적(19.5제곱킬로미터)의 25%를 차지한다. 게다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해 각종 비행사고와 미군 병사가 일으키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군 제1해병 항공단 제36해병항공군이 주둔한 이 기지에는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MV-22) 24대가 배치돼 있다.

현민들은 기지 이전이 아닌 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평화기행 둘째 날인 이달 1일 현지에서 만난 마츠모토 다로씨는 “현민의 80% 이상이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고 있지만 아베 정권이 일방적으로 이전을 추진해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마츠모토씨는 오키나와 평화를 기원하면서 설립된 사키마미술관의 학예사다. 사키마미술관은 후텐마기지에서 불과 100여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기지 전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그의 말대로 오키나와 현민들은 지난해 11월 지방선거에서 미군기지 이전반대와 철수를 공약한 오나가 다케시 오키나와현 지사를 당선시켰다. 오나가 지사는 지난달 23일 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헤노코 연안 매립공사 중단을 지시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공사를 멈추지 않았다. 지난 5일에도 오나가 지사와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두고 회담을 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오키나와 공무원노조에 해당하는 자치노조의 오오미네 카츠시 서기장은 “지금도 오키나와 현민들은 헤노코에서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4시간 농성을 벌이고 있다”며 “현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아베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소개했다. 오키나와에 있는 노조들과 시민사회단체, 평화·인권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조각가이자 평화활동가인 긴죠 미조루씨는 “많은 현민이 아베 정권과 싸우다 다치고 잡혀가고 있다”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전투로 수많은 현민의 목숨을 앗아 가더니 이제는 평화마저 짓밟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긴죠씨는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일본에서 독립하자는 여론이 오키나와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독립왕국에서 일본으로 병합된 후 전쟁을 겪고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던 오키나와. 72년 다시 일본의 품에 안겼지만 전쟁과 평화를 둘러싼 갈등은 2015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 공공노련·의료산업노련 공동평화기행단은 지난달 31일부터 3박4일간 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와 위령탑·평화공원을 둘러보고 오키나와 현민들과 후텐마 미해병기지 이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카카즈공원 전망대에 오르면 주일미군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후텐마기지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의료산업노련


전쟁의 아픔을 평화의 기운으로

문득 제주도가 떠올랐다. 푸른빛 바다와 아열대 기후의 이국적 풍경, 한산한 시골마을과 화려한 휴양지가 뒤섞인 모습이 제주도와 흡사했다. 무엇보다 섬과 그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곳곳에 전쟁·학살의 상흔과 아픔이 남아 있었다.

일본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본토 상륙 저지를 위한 방어선을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제주도에도 구축했다. 하마터면 오키나와가 아닌 제주도가 미군과 일본군이 맞붙는 전쟁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는 48년 4·3 항쟁에서 사망자 1만2천명을 포함해 3만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아픔을 간직한 섬이다. 제주도민들은 오키나와 현민들과 마찬가지로 해군기지가 들어설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강정마을에 미해군 함대가 주둔할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김지훈 더하기 휴 여행사업단장은 “오키나와는 미군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유사시 중국의 남하를 저지하는 전쟁분계선이 될 것”이라며 “제주도 해군기지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과 더불어 중국을 견제하는 핵심 군사시설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김 단장은 “전쟁이 발발하면 군사기지가 들어선 곳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역사가 잘 보여 주고 있다”며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군사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와 제주도에 씻을 수 없도록 깊게 파인 아픔은 평화의 기운으로 다시 용솟음치고 있다.
 

▲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인근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탑.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에는 조선인 징용자 1만여명이 있었다. 이 중 1천명가량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위령탑 앞 화살표는 한국을 가리키고 있다. 김봉석 기자
오키나와 남부 맨 끝머리에 위치한 이토만시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오키나와 지방정부가 2차 세계대전 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곳이다. 공원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이 최후까지 저항했던 마부니 언덕을 중심으로 조성됐다. 그래서 공원은 '오키나와 종전(終戰)의 땅'으로 불린다.

공원에는 당시 희생됐던 20만명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검은색 위령비가 부채꼴 모양으로 줄지어 세워져 있다. 오키나와로 끌려와 희생된 조선인 313명(한국 국적 231명·북한 국적 82명)의 이름도 위령비에 적혀 있다. 공원 외곽에 위치한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에는 참혹했던 전쟁 상황을 보여 주는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다.

공원에서 5분 정도 걸어 나오면 한국 정부가 75년 광복 30주년을 맞아 세운 한국인 위령탑과 공원이 나온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에는 1만여명의 조선인이 징용됐다. 이 중 1천여명이 전투 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위령탑은 조선시대 왕릉과 비슷하게 아치형 돌무덤 형상으로 지어졌다. 위령탑 건립에 쓰인 돌들은 한국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위령비에는 “한국 청년들이 일본의 강제 징모(徵募)로 무수한 고초를 겪고 학살을 당했다”며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탑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공공노련·의료산업노련 공동평화기행단은 기행 첫날인 지난달 31일 두 곳을 들러 희생된 조선인 징용자들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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