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민주주의에도 질이 있다. 민주주의가 단지 절차적 투명성과 정의로움에 머문다면 질적으로 미흡하다. 질 좋은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그 사회의 번영과 평등을 동시에 만들어 내야 한다. 번영과 평등의 성취는 마샬(T.H. Marshall)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사회의 사회경제적 시민권(socio-economic citizenship)의 향상을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단순한 정치적 시민권의 증진을 넘어, 사회적 시민권의 향상을 낳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민주주의를 가꿔야 한다. 사회적 시민권에서 중요한 것은 바닥을 얼마나 높여 줄 것이냐의 문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협력·나눔·역지사지·상호이해 증진 등의 가치가 작동해야 한다. 즉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민권의 증진을 매개하는 중요한 가치는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다.

역사적으로 현대사회·산업사회·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된 이후 계산가능성·효율성·합리화를 하나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흐름은 끊임없이 사회 운영 과정에 내재하게 됐다. 그러한 흐름이 초래하는 사회성 약화, 연대 훼손, 공존기회 파괴 등의 사회병리적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제어할 것인가의 주제는 마르크스·베버·뒤르켐 등 이른바 고전사회학 대가들의 공통 관심사였다.

한국과 같이 정치적 민주화 이후 사회적 시민권 증진 과정에서 신자유적인 세계적 이데올로기 흐름에 맞닥뜨린 나라들은 사회적 연대의 증진을 도모할 기회를 훼손당할 수밖에 없었다. 구성원들의 협력과 평등지향적인 노력 대신 상호 경쟁, 개인주의적 성과 증진, 계량화된 수치상 경쟁력 증진, 그리고 그 결과로 초래될 사회적 불평등 용인 등이 강조됐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의 문제적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 속에서 우리 사회의 사회통합력과 연대는 취약해져 있다. 범죄와 자살의 증대는 그 대표적인 징후다. 구조적으로 보다 중요한 문제는 노동시장에 있다. 자본이 신규투자를 꺼리는 가운데 노동시장은 소수 상층부에게만 양질의 일자리를 허락하는 식으로 구조화돼 버렸다. 신규 일자리는 만들어져도 질이 낮거나, 아예 잘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우리의 이러한 병리적 상황은 다시금 고전사회학자들의 질문과 혜안을 뒤적거리게 만든다.

그동안 통념으로 자리 잡은 ‘국가의 의무’라거나 ‘자본의 필요에 따른 산물’이라는 일자리 창출과 관련한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은 스스로 일자리 창출 자체에 대해 그렇게 큰 의무와 부담을 지니지 않았다. 시민사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부와 시장은 이 문제에서 실패하고 있다. 사회적 시민권의 바닥이 구멍 뚫린 지금, 사회구성원들이 그저 손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일자리를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필자가 2000년대 내내 독일에서 체류하면서 지켜본 바, 가장 논란이 되고 인상적이었던 노동정치의 양상은 “떠나는 자본 붙잡기와 일자리 지키기”였다. 유럽 전역에서 90년대부터 이야기되던 사회협약이라는 것도 다 경쟁력을 증진시켜 투자기반을 확대하고 그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또 지켜 내자는 식의 의도를 지니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독일 노사정은 노골적으로 “일자리를 위한 동맹”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기도 했다.

우리의 지금 상황도 일자리를 향한 사회연대적인 길을 적극 개척하고 그를 위한 사회적 소통을 신장시킬 것을 요구한다. 일자리를 양적으로만 늘리려는 ‘묻지마 고용창출’의 길은 답이 아니다. 일자리를 매개로 한 사회적 시민권 증진을 모색해야 한다.

그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필요한 것이 사회적 연대와 유대의 증진이다. 지역 일자리에 대해 모든 경제사회적인 주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양질의 일자리를 지키고 만들어 내기 위한 창의적인 길을 찾는 소통을 산업과 지역에서 펼쳐 가야 한다.

지방정부는 고용문제를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펴야 하고, 자본은 고용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식을 고양해야 한다. 상층노동은 하층노동과의 진정성 있는 연대의 길을 창의적으로 찾아가야 하고, 시민사회도 그러한 길의 중심에서 공익지향적이고 건강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