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은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네 번째 작품이다. 감독은 데뷔작 <리턴>으로 2003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추방>으로 2007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엘레나>로 2011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을 받은 감독은 다시 <리바이어던>으로 2014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과연 얼마나 놀라운 재능의 감독인지 궁금하다면 <리바이어던>을 꼼꼼히 뜯어보길 추천한다. 과연 현실 세계를 담은 영화이면서도 상징이 오롯이 살아 있으며,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면서도 인류적 보편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개인을 덮치는 운명 혹은 국가

본래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말로, ‘거대한 바다괴물’이란 뜻을 지닌다. 17세기 홉스는 국가라는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리바이어던’이란 말을 가져왔다. 홉스의 저작 <리바이어던>은 개인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가 거대한 괴물처럼 무소불위의 권능을 지님을 말한다. 또한 멜빌의 소설 <백경>에서도 흰 고래를 ‘리바이어던’으로 부른다. 요컨대 ‘리바이어던’은 인간의 이유 없는 고통을 신학적으로 설명한 욥기와 국가의 등장을 설명한 홉스의 저작과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을 그린 멜빌의 소설에 걸쳐 있는 단어다. 즉 개인을 고통에 빠뜨리는 ‘운명’이나 막강한 위력을 지닌 ‘국가’, 혹은 무시무시한 ‘폭력’ 등의 의미가 겹쳐진다. 영화는 평범한 남자가 잘못된 국가권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건을 보여 주면서 신학적인 역설을 담아낸다. 또한 바닷가에 떠밀려 온 거대한 고래 뼈의 형상을 통해 영화적 상징성을 극대화한다.

러시아 소도시의 자동차 정비기술자 콜리야는 바닷가 외딴집에서 재혼한 젊은 아내와 사춘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콜리야는 수년째 시 당국과 재판 중이다.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 콜리야가 손수 지은 집이 시의 개발계획에 포함돼 쫓겨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콜리야를 돕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내려온 변호사 친구는 자신이 알아낸 비리로 시장을 협박하면 승산이 있다고 조언한다. 다음날 항소심은 허무할 정도로 패소하고, 밤중에 술 취한 시장이 콜리야의 집에 찾아와 막말을 퍼붓는다. 변호사는 사유지 무단침입과 직권남용 등으로 시장을 고소하려 하지만 경찰과 법원이 고소장을 받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항의하는 콜리야를 소란 혐의로 구금한다. 변호사는 시장을 찾아가 개인비리가 담긴 파일을 건네며, 모스크바 중앙당 고위자의 이름을 들먹인다. 시장은 콜리야를 방면시키고, 경찰·검사·판사 등을 방으로 불러 윽박지른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정의로운가. 콜리야를 돕기 위해 고소라는 법적인 방법을 구사하다가 안 되니 협박이라는 법 외의 방식을 유능하게 구사하던 변호사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콜리야의 아내와 익숙하게 정사를 나누는 사이였음이 드러난다. 이후 영화는 위태로운 분위기로 지탱돼 가던 콜리야의 가정이 낱낱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마침내 포클레인은 콜리야의 집을 처참하게 부순다.

킬도저 사건, 그리고 러시아

감독은 2004년 미국 ‘킬도저 사건’에서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다. 2000년 콜로라도주 소도시에서 자동차 수리점을 운영하던 마빈 존 히메이어는 가게 옆에 거대한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는 것에 반대했다. 공장이 들어서면 도로에서 가게 간판이 보이지 않고 진입로도 막히기 때문이다. 히메이어는 인터넷 활동을 통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공장설립 반대’라는 주민의견을 모아 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만 패소한다. 설상가상으로 지역신문이 반대운동을 ‘사적 이기주의’로 매도하면서 지지자들이 떠나고, 동거하던 애인마저 떠난다.

시 당국은 가게에 벌금을 부과하고 이를 거부하자 업무정지 명령을 내렸으며 결국 레미콘 공장은 들어섰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히메이어는 복수를 결심한다. 원래 가게로 진입하는 다른 통로를 내겠다며 구입해 놓은 불도저에 철판을 용접해 ‘킬도저’를 만들었다. 이것을 몰고 다니며 공장·시청·지역 언론사·시장 관사 등을 파괴했다. 경찰특공대의 포위를 받은 히메이어는 ‘킬도저’ 안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감독은 미국의 이 사건을 러시아로 가져오면 어떻게 될지 고민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국가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긴 개인이 관공서를 때려 부수는 복수라도 하지만 러시아에선 그마저도 불가능할 것이며 대신 개인의 집이 철저하게 부서질 것이라고 결론 내린 감독은 콜리야의 집이 ‘하우스’뿐만 아니라 ‘홈’이 박살나는 꼴을 보여 준다.

영화가 비춘 러시아의 상황은 실로 끔찍하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부패한 시장은 경찰·검찰·판사를 불러 놓고 “내가 낙선하면 너희들도 끝장이야”라고 소리친다. 그는 변호사가 정말로 권력자와 친분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납치·폭행을 일삼고, 사건을 조작해 콜리야를 중형에 처한다. 법이 권력 안에 있는 무법한 곳이다. 시민들은 역대 권력자들의 초상에 총질을 하고 보드카를 들이키는 것으로 분풀이를 할 뿐 무법한 현실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다.

불륜의 정사는 일상적이고, 부부 간 정사는 폭력적이다. 콜리야의 가정은 이미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중이었다. 이를 목격한 아들이 바닷가로 뛰쳐나와 꺼이꺼이 울며 바라보는 곳에 뼈만 남은 ‘거대한 바다 괴물’이 있다. 이것은 형해화된 가정이자, 국가를 은유한다. 이는 또한 뼈대만 남았을 뿐 아무런 작동도 하지 못하는 국가 역시 콜리야의 가정처럼 해체되기 직전임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끊임없이 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카메라가 한참 응시하던 성화는 요한의 목을 자르는 살로메에 관한 그림이었다. 여기는 무도한 권력자가 예언자의 목을 베는 곳이다. 아내의 죽음을 접한 콜리야에게 신부는 욥기를 들려준다. 이유 없는 고통을 겪는 인간이 신의 뜻을 묻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평화가 온다는 신부의 말은 콜리야에게 곧 닥칠 수형생활을 예고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은 콜리야가 감옥에 갇혔을 때 종교가 말하는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무도한 시장도 신을 믿는다. 시장의 담당 신부는 기부금 얘기를 할 뿐 별다른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 영화는 콜리야의 집을 부수고 들어설 건물의 착공식을 보기 위해 교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하는 신부의 축사를 들려준다.

“권력이 아닌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권력에 의해 진실이 완패 당한 상태에서 들려주는 저 메시지는 무엇인가. ‘권력에 의한 완벽한 승리’가 바로 권력과 결탁한 종교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냉소인가. 아니면 권력이 일시적으로 승리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실이 승리할 거라는 서늘한 경고인가. 욥의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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