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정치개혁 논의가 뜨겁다.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가 현행 선거제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부터다. 헌법재판소는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구별 인구편차가 1대 3까지 나면 투표가치의 불평등을 피할 수 없다"며 올해 말까지 1대 2로 줄이라고 결정했다. 가장 큰 선거구 인구수가 가장 작은 선거구 인구수의 두 배를 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유권자 1명의 투표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을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선거제도를 뒤집을 파격적인 제안도 나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올해 2월 국회의원 의석을 정당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자며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중앙선관위는 비례대표를 현행 54석에서 100석으로 늘리고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주문했다.

국회도 바삐 움직이고 있다. 국회는 이달 17일 헌법재판소 결정과 중앙선관위 의견을 바탕으로 선거제도 개편안을 마련할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문제는 표의 등가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다. 그래서 유력하게 제출되는 의견이 독일식 정당명부제다.

<매일노동뉴스>가 각종 강연이나 칼럼을 통해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 강남훈(58·사진) 한신대 교수(경제학)를 만났다. 강 교수는 “우리나라는 1인 1표제를 기계적인 평등선거로 인식하는 불평등의 역사를 갖고 있다”며 “비례대표를 강화해 유권자들의 표를 선거 결과에 반영하는 것을 정치개혁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공공선택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다. <기본소득운동의 세계적 현황과 전망> <더불어 행복한 민주공화국> 등의 저서를 통해 노동·정치 이슈를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냈다. 지금은 정치혁신을 통한 사회개혁 방안을 찾기 위해 출범한 혁신더하기연구소 소장으로 일한다. 최근에는 '칼라밍'이라는 사이트에 국내 선거제도의 문제점과 대안으로 거론되는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소개하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혁신더하기연구소에서 진행됐다.

"1인 1표에 묻힌 불평등"

- 현행 선거제도는 87년 체제의 유산이다. 문제가 있다고 보나.

“쉽게 말해 불평등 선거다. 87년 민주화 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소선거구제가 도입됐다.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으니 평등하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1인 1표제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한 표 한 표가 정확하게 의석수로 반영돼야 한다. 경제·사회적 위치에 따른 불평등이 정치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형식적으로만 1인 1표를 보장하고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쓰는 '성과가치'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성과가치란 한 정당의 전체 의석수 대비 의석 비율(의석률)을 정당득표율로 나눈 값이다. 이 수치가 1이 되면 1인 1표제가 정확히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19대 총선 결과를 보자. 새누리당 정당득표율은 42.8%인데 의석률은 50.67%다. 성과가치가 1.184다. 당시 통합진보당의 성과가치는 0.421이다.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성과가치는 1.365, 민주노동당은 0.294였다. 정당 지지 성향을 볼 때 성과가치 격차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87년 이후 제도개선 논의는 없었나.

“그나마 17대 총선 때부터 정당투표가 시작됐다는 것이 거의 유일한 변화다. 그전까지만 해도 전체 의석수 중 지역구 선거를 통해 결정된 의석수 비중만큼을 비례대표로 각 정당에 배분하는 후진적인 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의미가 크다. 인구편차 조정 역시 넓게 보면 성과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각 정당이 선거구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획정하는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논쟁이 뜨거워질 것이다.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평등선거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본다.”

"중앙선관위 사실상 독일식 정당명부제 제안한 것"

- 중앙선관위가 국회에 제안한 개편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언론이 권역별 비례대표제라는 표현에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중앙선관위가 정치관계법 개정의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표현한 ‘병용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정치학자가 자신들의 선거제도를 ‘병립제’라고 표현했는데, 이와 반대되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단어가 병용제다. 병립제가 현재 우리나라처럼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각각 따로 뽑는 것을 뜻한다면, 병용제는 총 의석수 배분기준을 정당득표율로 정한다. 명부 작성을 권역별로 하느냐, 전국 단위로 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상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중앙선관위가 현재의 선거제도를 불평등선거로 보고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 국내 진보정당들이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앞서 언급한 성과가치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2009년 독일 총선 결과를 보고 당시 선거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현재 독일에서 집권하고 있는 기독민주당(CDU)의 성과가치가 1을 초과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CDU의 득표율은 29%, 의석률은 32.4%로 성과가치는 1.118이었다. 소수정당의 성과가치가 0.5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방치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같은 결정이 가능한 것은 독일이 선거제도의 목표를 의석수와 정당 지지율을 최대한 일치시키는 데 맞췄기 때문이다. 독일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선거구별로 1명을 뽑는 지역구 선거와 정당투표가 혼재돼 있다.

그럼에도 의석수 배분은 오로지 정당득표율에 따라 이뤄진다. 지역구 선거를 통해 당선된 의석은 무조건 보장한다. 여기서 초과의석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등장한다. 예컨대 독일의 A정당이 정당득표율에 따라 특정 선거구에서 60석을 배정받았는데, 지역구 당선자의 총합은 62명이라고 하자. 그러면 2명의 초과의석이 발생하는데, 독일 선거제도에서는 62석을 모두 인정한다. 대신 나머지 정당의 의석수 역시 A정당의 의석수 증가분과 똑같은 비율로 늘어난다.

그래서 독일은 기준 의석수가 총 598석인데도 실제 선거를 해 보면 600석 이상으로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 정당득표율로 총 의석수를 배분한 후 이를 초과하는 지역구 의석수를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유럽 복지국가 중 상당수가 지역구 선거가 없는 완전 비례대표제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정치현실을 감안하면 갈 길이 너무 멀다.”

"정당 많을수록 좋은 정치 가능성 높아진다"


- 독일식 선거제는 다수 정당이 난립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받지 않나.

“정치학계 석학인 아이버슨과 소스키스가 진행한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다. 유럽 17개국의 1945~1998년 사이 집권연합 성향을 분석한 연구다. 비례대표 중심 병용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진보 성향 집권연합이 정권을 잡았던 기간이 총 266년으로 보수성향 116년보다 70% 가량 길었다. 병립제를 택한 국가는 보수 256년, 진보 86년으로 반대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 정치환경이 열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계급을 배반하는 투표를 해서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한 정당에 표를 던져도 사표가 되는 구조로 선거제도가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최소승리연합' 같은 개념을 생각해 보면 정당은 많을수록 좋다. 선거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되는 집단은 중산층이다. 우파·중도우파·중도·중도좌파·좌파 등 스펙트럼이 다양한 정당이 생긴다면 중산층은 중도우파나 중도좌파를 선택할 가능성이 생긴다. 우리나라 같은 양당 체제에서는 중산층이 선택할 정당은 뻔하다.

또 정당이 많아지면 집권을 하기 위해 정당별 연합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정치인들의 선거 공약이 국민에게 하는 어정쩡한 약속이 아니라 지속적인 집권을 위한 조건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 공약을 파기했는데, 만약 그가 다당제 국가에서 집권연합을 통해 당선된 경우라면 그처럼 쉽게 말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집권연합이 새로운 형태로 구성되고, 당장 권력이 교체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나. 다당제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훨씬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비례대표를 배분하는 정당득표율 5% 기준도 지나치게 높다고 본다. 1%로 진입장벽을 낮춰 다당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 중앙선관위가 비례대표를 100명으로 늘리자고 제안했다. 적정 의석수는 얼마라고 보나.

“우리나라 의석수는 인구수 대비 너무 적다. 당장 늘려야 한다. 독일 의석수가 유럽 평균 수준인데, 이를 감안하면 우리나라는 500명 정도가 적당하다. 국회의원에게 특권이 부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행정부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의석수가 늘면 의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도 당연히 그만큼 줄게 된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가 의정활동에 반영되는 것은 물론이다. 기업이 로비를 해도 500명에게 해야 한다. 권력은 분산시키는 것이 원칙이다. 단 국회의원 세비는 동결해야 한다.”

- 정치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은 상황이라 국민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국민이 정치 혐오증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국민 정치의식이 정치제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사실 나쁜 정치제도는 국민의 나쁜 정치의식과 맞물려 있다. 정치제도든, 정치의식이든 하나를 먼저 깨야 한다. 국민이 ‘정치야 늘 그대로인데 정치인을 늘리면 뭐하냐’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기존 정치인들의 특권을 유지시키는 기반이 된다. 정치혐오증을 불러일으켜 나쁜 정치인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바른 정치인들의 국회 진출이 어려워지는 구조 말이다. 국민이 정치를 포기하는 순간 좋은 정치는 국민에게서 멀어진다.”

"정치개혁 머뭇하면 양당 체제 심판받을 것"

- 일각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다.

“보수정당에 대한 정당 지지율은 절반을 넘지 않는데 대통령 선거를 하면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 양당제의 폐해다. 서민이나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은 보통 3당이나 4당에서 출발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지형에서는 싹을 틔우기도 전에 말라죽는다. 유럽 복지국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없다. 당장은 어렵지만 비례대표제를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종국에는 내각제를 구축하는 것이 복지국가로 가는 확실한 수단이다.”

- 얼마 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출범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낼 것으로 보나.

“지금 같은 지역구 중심 체제에서는 의원들이 정당 활동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지역 표 관리에 힘을 쏟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가 '예산 따기' 같은 후진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불평등한 선거제도를 바꾸라는 헌법재판소 결정과 중앙선관위의 제안이 나온 마당이다. 이번만은 좋은 정치제도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중앙선관위가 제안한 병용제를 기반으로 의석수를 500석으로 늘리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새누리당의 반대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역구 의석수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고, 비례대표를 100석으로 늘리는 심상정 정의당 의원의 개혁안이 현실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 그동안 시민사회에서 다양한 비례대표 확대 노력이 있었지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근 30년 만에 찾아온 정치개혁의 적기다. 분발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성과가치의 균형을 잡으라는 결정을 내렸고, 중앙선관위는 평등선거를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선거법 개정의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이 기득권 유지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그러면 발전 없는 양당 체제에 분노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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