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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72] 13주기 전태일 추도식
   
▲ 추도사를 하는 민종덕 추도위원장.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버스는 마석 모란공원에 뒤늦게 도착했다. 전태일 묘지 바로 근처에 새로 묘를 파는 작업을 하는 천막이 쳐져 있고 인부들이 불을 피우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안전기획부 요원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전태일 추도식을 감시하기 위해 작업을 하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전태일 13주기 추도식이 시작됐다. 참석자들 모두가 숙연해졌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의 사회로 추도식이 시작됐다. 설교 순서가 되자 조화순 목사가 설교를 했다. 조 목사는 카랑카랑하고 매서운 목소리로 힘없이 말씀하셨다.

"여기 우리가 지금 전태일의 묘 앞에서 눈물이나 흘리려고 왔다면 그런 추도식은 이제 없어야 합니다."

숙연하게 시작된 추도식

그러면서 조 목사는 80년 이후 노동자들의 상황과 자신의 나약함을 뼈아프게 고백했다. 참석자 모두 5·17 이후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고 눈물을 흘렸다.

민종덕 추도위원장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전태일 열사, 당신은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새롭게 돌아와 있습니다. 노동자 권리는 기업주와 권력의 칼 앞에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린 오늘의 암울한 현실 앞에 또다시 당신은 서서히 분노의 활화산 같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은 전 사회의 민주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 한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민주화 역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뿐만 아니라 보다 각성된 노동자들의 사회의식이 없는 한 이룩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 땅의 모든 민주시민의 민주화 제단 앞에 당신은 새로운 전태일의 신화를, 터져 나오는 울분과 고통의 폭탄선언을 입에 악물고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여기 살아 있습니다."

원풍모방의 방용석 지부장도 결단과 다짐을 말했다. 추도사는 계속됐다.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와 블랙리스트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은 저마다 요구조건까지 말하며 추도사를 읽었다. 이어 전태일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문익환 회장은 '전태일'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한국의 하늘아
내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문익환 회장의 시 낭송은 사자후(獅子吼)처럼 온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지막으로 이소선의 기도가 시작됐다.

"모든 것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어렵고 추운 형편에 잊지 않고 우리를 여기에 이끌어 주시고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이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들이 더욱더 똘똘 뭉쳐 하나가 된다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여기 참석하신 모든 분들 그리고 기억하고 관심은 있으나 참석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의 발걸음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또한 어지럽고 포악한 위정자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분향 순서를 끝으로 비장(悲壯)한 추도식이 끝났다.

추도식을 마친 참석자 모두는 공터에 빙 둘러앉아 어묵과 막걸리로 허기와 추위를 달랬다. 풍물패들은 장단을 치고 춤을 추며 흥을 돋웠다. 촌극 순서에서는 청계 노동자들이 노조 강제해산 이후 더욱 열악해진 노동현실을 재미있게 풍자했다.

촌극을 끝내고 모두 한 덩어리가 돼서 춤을 췄다. 이소선도 풍물 장단에 맞춰 참가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한참 춤을 췄다. 추위는 물론 그동안의 시름까지도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이소선은 참으로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려 신나게 노니 마냥 즐겁고 흐뭇했다.

“서울까지 걸어서 가자”

행렬은 71년 영등포 한영섬유에서 노조설립을 하려다 회사측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한테 드라이버로 머리가 찍혀 죽은 김진수의 묘소를 한 바퀴 돌았다.

해가 기울어 어스름해질 무렵 대열은 산에서 내려와 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모두들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버스 운전기사들이 운임비를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이다. 기사들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버텼다.

정보기관의 압력이 들어간 것이다. 정보기관은 4대의 버스가 서울 어느 한 곳에 도착해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내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버스를 분산시킬 꼼수로 운임을 미리 달라 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이에 추도위원회는 서울에 도착하면 운임을 주겠다고 했다.

이 문제로 주최측과 운전사들 사이에 실랑이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소선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라. 그냥 서울까지 걸어서 가자!"

이소선이 큰소리로 각 버스를 향해 소리쳤다.

"운전사들이 돈을 먼저 달라고 하는데 보나마나 ‘뻔할 뻔자’라고. 돈을 주면 서울 들어가는 입구 아무데나 우리를 내팽개치라고 기관원들이 압력을 넣으니까 저러는 건데, 우리가 뭐 벽창호인 줄 아나. 안 간다 카니까 우리 모두 내려서 서울까지 걸어가자고. 차 안에 둔 짐들 다해 봐야 버스비도 안 되니께."

그러면서 이소선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이어 참석자 모두가 따라 내렸다. 그리고 풍물패가 나오고 플래카드가 다시 선두에 서고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어께동무를 하고 열을 지어 모란공원을 빠져 나와 경춘국도에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이 형성됐다. 시위대는 <농민가>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해방가> 등을 부르면서 행진했다. 지나가던 차들이 갑자기 나타난 시위대열에 놀라서 주춤주춤 지나갔다.

이렇게 경춘국도를 한참 가는데 추도객을 태우고 왔던 관광차들이 대열 앞에 멈춰 서더니 이번에는 문을 열어 놓고 타라고 사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춘국도를 노래 부르면서 신나게 뛰다가 걷다가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던 참가자들은 타지 않고 계속 행진했다.

행진 대열은 이렇게 마석역까지 왔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졌다. 마석역에서 서울로 가는 방향 길목에는 전투복 차림을 하고 헬멧과 방패를 든 전투경찰들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었다. 대열은 멈춰 섰다. 국도는 완전히 막히고 구경꾼들은 모여들어 주위 건물 옥상까지 빽빽하게 들어섰다.

추도식 참석자들은 마석역 앞에서 즉석 집회를 열고 농성하다가 버스에 올라타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두들 노동자 만세, 노동운동 만세,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날의 추도식 행사는 이소선은 물론 70년대 민주노조 운동가·해고자·민주인사들이 신군부 폭압에 억눌렸던 울분을 토하고, 아울러 패배감을 떨쳐 내고 자신감과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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