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위원장님, 살려 주십시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대로 나가면 신용불량자밖에 안 됩니다."

요즘 박정현(44·사진) 사무금융노조 하이투자증권지부장의 휴대전화에는 하소연을 담은 조합원들의 문자메시지가 끊이지 않는다. 불안·억울·한탄·분노가 뒤섞인 조합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접한 박 지부장도 연일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밤 10시나 11시가 넘으면 술 한잔 걸친 조합원들로부터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옵니다. 그럴 때마다 제대로 싸워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칩니다. 회사가 조합원들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하이투자증권이 지난달 29일 전체 임직원의 26%를 감축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예고하면서 노사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회사는 권고사직을 포함해 250명을 희망퇴직시키고 20곳의 영업점을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회사가 꼽은 구조조정 배경은 모기업인 현대중공업의 실적 부진에 따른 증권사 신용등급 하락 우려, 리테일 영업적자다. 하이투자증권은 23일 권고사직과 희망퇴직 시행공고를 낸 뒤 늦어도 다음달 31일까지 구조조정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지부는 조직을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하고 구조조정 백지화를 요구했다. 지난해 말 선출된 박정현 지부장은 이달 말로 예정됐던 이·취임식과 정기대의원대회를 무기한 연기했다. 지난 12일 밤 서울 중구 한 커피숍에서 분회 순방 중 짬을 낸 박 지부장을 만났다.

살생부 내놓고 '희망퇴직'이라니

박 지부장에 따르면 사측의 구조조정 계획 발표는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2014년 단체협약 조인식을 치른 지 이틀 만에 구조조정을 발표한 것이다. 노조가 합법파업을 벌일 수 있는 길은 차단됐다. 쟁의행위 요건을 충족하지 않은 파업은 불법이다. 의도적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회사는 '권고사직을 포함한'이라는 단서조항을 붙여 이른바 '찍퇴(대상자 선정 뒤 해고)'도 협박했다.

며칠 뒤 사측은 리테일 지점장들에게 이른바 생존자 명단을 나눠 줬다. 살생부였다. 박 지부장은 "조합원 간 분란을 조장하고 투쟁 동력을 흔들겠다는 목적"이라고 비판했다. 생존자 명단이 나돌면서 본사와 영업점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가 제시한 구조조정 대상은 △선임 차장 46세 기준 △차장 42세 △여직원 38세 △3년간 인사고과 C등급 이하 △5년 이상 승진누락자 △맞벌이 부부 혹은 사내커플이다.

게다가 회사가 제시한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직원들이 생존자 명단에서 누락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박 지부장은 "생존자라는 언질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망연자실하고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상태"라고 전했다. 그는 "회사가 내놓은 구조조정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서태환 사장은 '회사 신용등급 하락을 막기 위해 증자나 후순위채 발행 등 모든 방법을 알아봤지만 안 됐다.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이투자증권의 신용등급은 현대미포조선이나 현대중공업의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같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하이투자증권이 구조조정을 하든 안 하든 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여지가 없다는 거죠."

회사가 내놓은 구조조정 명분에 정당성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방법 동원해 구조조정 막겠다"

지난해 증권업계에 몰아친 구조조정 한파로 1만8천여명의 증권맨들이 힘도 못쓰고 거리로 내몰렸다. 지부로서는 업계 상황이 부담일 수밖에 없다.

"회의적으로 보는 조합원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을 바꿔 낼 수 있다고 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 볼 생각입니다. 적어도 찍퇴나 강퇴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부는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에서 사무금융노조 증권업종본부 주최로 열리는 증권노동자 총력결의대회에 전 조합원 집결 지침을 내렸다. 박 지부장은 "나가라는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자본가들의 못된 버릇을 고쳐 놓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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