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은
반올림 활동가

직업병 대책 마련을 위한 2차 조정위원회에서 삼성전자의 제안으로 지난 22일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을 다녀왔다. 반도체 여성노동자들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을 찍은 홍리경 감독은 반도체 공장 안이 너무 궁금하다며 냄새랑 소리까지 느껴지게 알려 달라고 했다. 핸드폰 카메라에는 보안 스티커를 붙였고, 클린룸에는 카메라도 녹음기도 가져갈 수 없었으니 그림을 그려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이들이 느낀 답답함도 이것이었다.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증명하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자료는 자신이 일한 공장과 작업내용을 재현한 그림이었다. 산업재해에 협조해야 할 기업은 시종 “영업비밀”이라거나 “관련이 없다”는 이유를 대며 자료를 내놓지 않는다. 산재로 인정받기까지 참으로 고단한 과정을 거친다.

우리가 들어갔던 곳은 삼성 반도체 라인 중 최신 시설인 S1라인이었다. 방진복을 입고 라인에 들어서자 삼성은 스크린을 보여 주며 화학물질명을 넣으면 안전보건 정보가 뜬다고 자랑했다. 옆에 매우 두꺼운 책자 형태로 놓여 있는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도 안내했다. 생산량을 맞추려 안전장치(Rock)도 꺼놓기 일쑤였다는데 일하면서 노동자들이 이런 정보를 볼 틈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방사선이 노출된다는 임플란트 공정에 이르자 황상기(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백혈병 사망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씨가 설비 앞에서 방사선 측정기를 이리저리 대어 봤다. 거대한 유리로 막혀진 임플란트 공정은 자동화돼 있었지만 안전성을 완전하게 보장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웨이퍼에 정확하게 이온이 주입되는지 보려면 유리창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 유리창으로 방사선이 노출된다. 임플란트 공정에서 오퍼레이터 업무를 봤던 김도은씨는 퇴직 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공단은 방사선 노출과 교대근무 때문이라며 산재로 승인했다.

반올림은 지난 8년간 삼성 백혈병 직업병 문제를 시작으로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문제를 제기해 왔다. 고 황유미씨가 법원에서 산재인정 판결을 받기까지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의 알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어떤 물질을 썼는지를 소송 과정에서 아는 이들도 많았다. 미국에서는 크고 작은 화학사고를 겪으며 우리보다 앞서 알권리 운동을 시작했다. “당신들에게는 알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포스터를 공장 곳곳에 붙여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워 주거나 실제 노동자가 쓰는 약품통에 스티커를 붙여 위험성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지역주민이나 누구라도 정보를 알고 싶으면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된다.

짧은 견학을 마치고 클린룸을 나왔다. 나무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림이 아닌 건강한 작업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인근 하천에서 1만여 마리의 물고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8년 전부터 드러나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의 행렬이 물고기의 죽음과 닮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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