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 로스코, <무제>, 캔버스위에 아크릴, 1970년,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유난히도 추웠던 1970년 2월25일 수요일 아침.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조수인 올리버 스타인데커는 여느 때처럼 오전 9시에 로스코의 작업실에 출근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힘차게 아침 인사를 했다. “굿모닝!” 하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로스코의 대답이 없었다. 불안에 사로잡힌 채 작업실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 마침내 스타인데커는 주방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스코를 발견했다. 끔찍하게도 그가 누워 있는 곳 주변은 온통 피로 흥건했는데, 면도날로 손목 동맥을 잘랐기 때문이었다. 부검 결과 로스코는 항 우울제 과다복용과 이에 따른 중독으로 평소 고통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의사는 로스코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렸다. 그의 나이 65세 때의 일이었다.

그가 피범벅이 된 채 발견됐을 때, 화실의 이젤에는 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손목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피로 그렸다고 해도 믿을 만큼, 핏빛으로 가득 찬 마지막 그림이다. 그 중간엔 희끄무레한 선이 주저하듯, 새겨져 있다. 마치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었던 상처 같은 느낌이다. 그는 왜 이렇게 피비린내가 진하게 나는 그림을 남겨 놓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우울증은 도대체 왜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것일까.

마크 로스코는 1903년 러시아 드빈스크(현 다우가프필스, 라트비아)에서 유대인 가족의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때 러시아는 유대인에게 유독 혹독했고, 아들들은 차르의 군대에 징집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로스코 가족은 미국 이민이라는 결단을 내렸지만, 미국에서의 삶도 그리 녹록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는 계속 따라다녔다. 애초 법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던 로스코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대에 다닐 만큼 학업성적이 뛰어났지만, 예일대의 엘리트주의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 실망한 데다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2학년 때 자퇴하고 만다. 하지만 곧 차별받고 박해받던 젊은 유대인은 새로운 구원의 길을 찾아낸다. 학교를 나와 1923년 어퍼웨스트사이드의 봉제공장지구에서 일자리를 얻은 그는 우연히 미술학교인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미술에 눈을 뜨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예술가 로스코’의 시작이었다.

가난한 이민자 출신의, 자존심 강한 반골 성향의 유대인 예술가. 그가 바로 로스코였다. 그런데 이런 모든 악조건(?)은 로스코를 주눅 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힘이 됐다. 로스코는 예술이 돈에 좌지우지되며, 그림이 부자들의 아파트를 장식하는 현실을 거침없이 비난했다.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몰라도, 로스코에겐 돈으로부터 예술의 순수함을 지킨다는 ‘우월감’이 있었다. 이런 예술에 대한 자세는 그에게 당당함을 줬으며, 흡사 콜로세움의 검투사 같은 혈기를 불어넣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많다. 로스코는 브루클린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학장과 격렬하게 다투고 곧바로 강사 일을 때려치우기도 했으며, 미술관 직원들과도 자주 언성을 높였다. 심지어 그는 싸움 끝에 미술관 유리창을 박살내기도 했던 ‘망나니(?)’였다.

그러나 로스코의 예술은 그의 호전적인 성격과는 반대로 명상적이고 종교적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낸 것은 1949년 초였다. 이제 막 두 차례씩이나 세계를 휩쓸고 간 잔학한 전쟁이 끝난 뒤였다. 전쟁은 인간들에게 그 어떠한 것에서도 감동받지 못하는 ‘정신적 불감증’을 안겨 줬다. 따라서 로스코는 강렬한 감정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언어만이 이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자연을 단순 모사하는 예술을 단호히 거부했다.

“조형 예술이나 시·음악 가운데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작품이 있을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무언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극적인 것을 만들기 위해 재현이라는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로스코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진 대신 빛을 발하는 색들만이 가득 채워졌다. 색깔들이 환상적으로 배치돼 있는 로스코의 그림들은 예수나 성모마리아가 그려져 있지 않음에도, 관객들에게 마치 성화처럼 성스럽게 다가왔다. 1957년 인터뷰에서 로스코는 이렇게 얘기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겪은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비극이나 무아경·파멸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 그림 앞에 설 때 힘없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그 기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어느새 로스코는 유명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색면 회화’의 선구적 작가가 된 것이다. 1950년대 말이 돼서는 상업적인 성공까지 찾아왔고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으로 명성이 자자해졌다. 누구나 이런 상황이 닥치면 크게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로스코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야 했다. 로스코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예술계의 기득권층’에게 인정받자, 그는 갑자기 호전성을 잃고 날개 꺾인 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로스코의 친구이자 큐레이터였던 캐서린 쿠는 이렇게 증언했다.

“점점 더 성공적인 작가가 돼 감에 따라 로스코는 일찍이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해악을 스스로 범하게 될지도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 빠져들었다. 이런 심리적 갈등은 그를 의기소침하고 불안정하게 했으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그렇게 긴장감과 신경쇠약에 빠져 버린 로스코는 이제 ‘명성’을 유지하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됐다. 하긴, 어떻게 얻어 낸 ‘인정’이었는가. 젊은 날의 투지를 반납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손에 쥘 수 있었던 열매였다.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팝아트’의 부상은 그에게 현실적인 위협이 됐다. 젊은 팝아트 작가들은 광고 같은 일상적이고 속된 것들을 도발적으로 작품에 이용해 순식간에 인기를 얻고 스타가 됐다. 반면 로스코와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어느새 완고하고 거만한, ‘시대에 뒤떨어지는’ 엘리트적인 미술이 됐다.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운 나머지 로스코는 팝아티스트들을 “협잡꾼이자 젊은 기회주의자”라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로스코의 분개와 상관없이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이 이제는 앤디워홀의 ‘마릴린 먼로’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로 대표되자, 로스코의 작품들은 우울증을 반영하듯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검정과 회색’ 회화들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로스코는 “이 작품들은 죽음에 관한 것”이라고 바로 대답하곤 했다. ‘색의 화가’였던 로스코에게, 색조의 이러한 퇴락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것이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는 방증이었을까. 실제로 이즈음 로스코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대동맥에 이상이 생겨 병원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알코올과 흡연을 절제하거나 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로스코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메모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생전 그토록 사라질까 걱정했던 ‘명성’은 그대로 남았다. 로스코가 하늘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다시 그림의 색깔은 밝아졌을까.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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