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축구평론가

지난 세기말에 미국의 극우파 사상가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일단 현상적으로 헌팅턴의 관찰은 현실과 부합했다. 서구문명의 대변자인 미국과 이슬람 문명권의 몇몇 나라들이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급기야 ‘충돌’, 즉 전쟁과 테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문명의 충돌’로만 이해한 것은 사태의 표면만 스케치한 것이다. 그러한 피상적인 관찰은 사태의 본질을 은폐할 뿐이다. 종교나 문명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허울일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군사적 팽창주의, 강력한 무력통치를 위한 국수주의, 각종 이권과 관련한 추악한 패권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빌미로 저마다의 국내 정치조건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려는 고도의 정치기술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졌을 뿐이다.

최근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프랑스 시사만평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얼핏 보기에 이슬람 테러분자들이 프랑스 언론인을 테러한 사건이다. 그러나 중동지역 테러리스트들이 프랑스로 잠입해 거행한 테러가 일단 아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프랑스 시민으로 성장한 알제리계 프랑스 사람들이 ‘자국민’에게 시도한 테러라는 점에서 좀 더 섬세한 관찰을 요구한다.

언론인과 경찰 등 12명을 테러하고 현장에서 사살된 사이드 쿠아시(34)와 셰리프 쿠아시(32) 형제, 그리고 도피 중인 여성 공범자 하야트 부메디엔(24)은 알제리 출신 이민 2세들이다. 유대인 식료품 가게에서 인질 4명을 죽이고 그 자신도 사살 당한 아메드 쿨리발리(32)는 세네갈 출신 이민자 2세다. 그들의 국적은 모두 프랑스다.

이 점이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무려 150여만명을 처단할 정도로 알제리 독립운동을 진압했다. 1830년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든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의 교두보로 삼았고 현지인들을 반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며 철저히 프랑스 문화를 알제리에 이식했다.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던 1945년 5월에는 알제리 현지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수만 명을 죽였다. ‘세티프 학살 사건’이다. 알제리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61년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 사람들을 진압해 700여명을 학살하고 그 주검을 센강에 던졌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 예술의 도시 파리, 예술의 젖줄 센강에 말이다.

그 이후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알제리계 이민자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2등 시민 혹은 비국민으로 전락해 극단적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됐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이민자들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 같은 프랑스 사회의 자체적 모순과 문제 해결 능력의 결여 및 편향된 인식이 이번 테러의 역사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다.

자, 이제 축구 얘기를 해 보자. 어느 한 나라의 축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일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나라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알제리도 축구로 해가 뜨고 지는 나라다. 경제여건과 기후조건 때문에 다종다양한 스포츠를 일상적으로 누리기 힘든 지역이라서 공 하나로 거의 모든 열정이 폭발할 수 있는 축구가 알제리에서도 일찌감치 만개했다.

알제리 축구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세기에 걸쳐 지배-식민지 관계였기 때문에 정치경제 같은 사회적 생활뿐만 아니라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두 나라의 무늬는 상당히 비슷하다.

특히 축구는 프랑스로부터 비롯돼 다시 프랑스로 진입하는 길로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가난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식민지 조선으로 넘어와서 군산·목포·인천 같은 개항장에서 일한 것처럼 제국-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먹고살기 위해 알제리로 많이 건너왔다. 동시에 그들은 유럽의 축구공도 함께 들고 들어왔다.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알제리 사람들이 함께 공을 찼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소설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를 들 수 있다. 프랑스에서 알제리로 이주해 온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카뮈는 대학 시절까지 축구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그렇게 알제리 축구가 출발했는데, 60년대 이후에는 프랑스로 대거 이주한 알제리 사람들로부터 또 다른 축구가 시작됐다. 알제리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정착한 이들의 자식들은, 이 세상 빈민가 소년들이라면 어김없이 하는 행동대로 싸움을 하거나 공을 찼다. 여기서 비범한 스타들이 탄생했다. 불세출의 스타 지네딘 지단이나 현재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있는 공격수 카림 벤제마 같은 선수들이 그렇다. 이들의 국적은 프랑스, 그러나 핏줄은 알제리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알제리의 무자비한 공격에 시달렸다. 그 경기가 있기 직전 한국 매체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시종일관했다. "아프리카 팀들은 돈 문제 때문에 자중지란을 겪는다"거나 "의지가 부족해서 실점하면 팀이 무너진다" 혹은 "아프리카 선수들은 체력과 투지만 앞세운다" 같은 도저히 정보와 분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아프리카에 대한 터무니없는 편견 일색이었다. 그런 무지와 편견 때문에 "알제리를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보도가 많았고 대표팀 감독도 그리 판단했으나 오히려 우리가 알제리의 제물이 됐다.

아프리카에 대한 터무니없는 편견에 더해 알제리 역사와 선수들의 삶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이었다. 일단 알제리 선수단 중 무려 12명이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의 유소년 리그와 청소년 대표팀에서 성장했다. 유럽 명문리그에서 활약함은 물론 프랑스 대표팀의 유력한 후보로까지 거명되던 선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알제리를 택했다. 첫 번째 이유는 프랑스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할 상황이 되자 이중국적을 근거로 알제리를 선택해 월드컵에 진출한 것이다. 축구선수로서 월드컵이라는 꿈의 무대에 서 보려는 욕망 말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일까. 알제리 독립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50년대에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58년 스웨덴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프랑스 대표팀의 무스타파 지투니와 라치드 메클루피가 팀을 이탈해 버렸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튀니지를 거쳐 독립운동 중인 알제리로 찾아가 현 알제리 대표팀의 전신이 되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축구팀'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던 상태였고 따라서 월드컵에 출전할 수도 없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 두 선수는, 그러나 핏줄을 따라 알제리로 돌아가서 공인받을 수 없는 축구 대표팀을 만들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축구공으로 알제리 독립을 호소했다.

마침내 알제리는 62년 독립했고 이듬해 대표팀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바로 이러한 역사가 알제리의 축구문화에 새겨져 있으며 지난해 브라질에서 무슨 까닭인지 아프리카 하면 무조건 얕잡아 보는 한국 축구 및 한국의 낡은 의식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것이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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