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갑질’이 논란이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이미 치솟은 사회적 분노가 백화점 진상고객에 의해 무릎을 꿇은 아르바이트 주차요원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들끓고 있다. 소셜커머스 업계의 신흥강자 위메프가 신입사원을 채용해 2주의 수습기간 동안 강도 높은 영업업무를 시키고서는 전원 해고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람들은 이 사태에도 갑질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이념적 지향을 가릴 것 없이 갑의 만행을 허용하는 사회문화를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많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주로 개인들의 반성과 개선을 촉구한다. 종합편성채널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소견이 그렇다. 스스로 갑질을 한 적은 없는지 돌아 보자는 취지인데, 사회가 갑과 을로 분열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을의 분노가 더 이상 집단적으로 조직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와중에 어느 커피전문점 브랜드의 이벤트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일명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벤트’라며 고객이 따뜻하고 공손한 말투로 주문을 하면 그 정도에 따라 음료의 가격을 차등적으로 할인해 주는 방식이다. 이벤트가 시작되자 얼굴에 웃음꽃이 핀 바리스타와 고객의 화기애애한 장면을 담은 언론보도가 나왔다. 갑질 세태에 대한 ‘을의 세련된 반격’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한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훈훈하기 그지없는 포장지를 벗겨 낸 실상은 어떠할까. 점원들은 오히려 고객들에게 행사 내용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업무까지 떠안아야 했다.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점주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결국 당일 모든 손님에게 반값 할인을 해 준 매장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할인행사 탓에 평소보다 손님이 몰리면 점원들의 노동강도는 순식간에 올라간다.

반값 할인으로 얻은 친절은 마음의 작은 위로조차 될 수 없다. 할인받기 위해 가공된 ‘따뜻한 말’이 커피전문점에 종사하는 을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같은 커피전문점은 지난해 10월4일에도 천사(1004)데이라며 같은 이벤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서로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이 ‘천계(天界)’에서나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천사까지 되지 않아도 그저 인간이라면, 서비스를 소비하느냐 제공하느냐에 상관없이 동료시민에 대한 존중을 가져야 한다.

갑질의 한 형태인 감정노동 문제에서도 소비문화를 개선하는 것은 중요한 영역이다. 갑의 문제를 다뤄 유행한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이 보여 주듯, 을로 고통받다가도 상대적인 갑의 위치에 오르는 순간 돌변해 또 다른 을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각자가 노력해 착한 사람이 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갑을 관계에 대해 시시때때로 쌍방의 위치만 변할 뿐 그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과 폭력의 구조가 변함없이 튼튼하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해 싸워야 한다.

실제로 어떤 선의가 있더라도 소비문화만을 강조하며 개별 행위자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경향은 위험하다. 그것은 손쉽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할인 이벤트 따위로 변질돼 감정노동의 문제마저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 전략에 소비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느 ‘꼰대’ 같은 교수의 말처럼 패기 있게 저항해야 할 청년들이 세 명이나 동시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갑의 폭력에 굴복하고 순응하게 만드는 구조, 소비자가 되는 순간 왕이 되는 진상고객에게도 웃는 낯을 강요하는 감정노동의 구조를 드러내야 한다.

그 구조의 핵심에는 자본의 이익이 있다. 사장에게 호소하면 "손님 떨어진다. 네가 참아"라는 답이 돌아온다. 직원은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윤을 무제한으로 추구하는 기업들이 경쟁적인 고객만족제도를 통해 노동을 새롭게 규율하고 통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인격을 지켜 낼 권리, 부당한 행동을 단호히 거부할 권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고용의 불안정성이 확대되면서 을의 지위는 치명적으로 취약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비루해지길 강제하는 노동의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갑질 논란은 행위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자 노동의 문제다. 상대방의 호의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나의 권한을 획득하는 문제다. 반값 할인으로 얻은 따뜻한 말이 우리를 전혀 위로해 주지 못하는 이유다.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scottnearing8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