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1999년 벨기에 사회에 로제타가 등장했다면, 2014년의 한국에는 장그래가 있다. 대중문화 속의 두 인물은 모두 일자리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의 표상이다. 벨기에 정부는 영화 <로제타(Rosetta)>가 일으킨 사회적 반향에 힘입어 일정한 규모 이상의 기업들이 청년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강제하는 강도 높은 실업정책을 추진했다. 이른바 ‘로제타 플랜’이다.

원작 웹툰을 각색한 드라마 <미생>이 최근 큰 화제를 모았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대통령도 청년일자리 문제에 대해 발언하며 드라마를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석(死石)이냐 완생(完生)이냐의 절박한 갈림길에 놓여 있는 청년들에게 조언했다.

“젊은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남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을 한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바둑에서 말하는 '완생마'가 될 것이다.”

필자는 박 대통령의 말에서 좁히기 힘든 입장의 차이를 느꼈다. 미생이라는 말의 뜻풀이부터가 전혀 다르다. 청년의 현실에서 미생은 해소되지 않는 불안정한 삶을 상징한다. 반면 정부는 애써 그것을 가능성이라 말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얼마나 더 치열해져야 하는가. 얼마나 더 고민하고 노력을 해야 덜 불안해 하며 살 수 있을까.

정부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면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실체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근거 없는 약속, 대책 없는 희망은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올 뿐이다.

정부가 연말에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논의 테이블에 올린다고 한다. ‘장그래법’이라고 이름을 붙인 한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 핵심적인 내용들이 드러났다. 계약직 고용기간의 제한을 현행 2년에서 최장 4년으로 연장하는 것이 골자다. 퇴직금 확대, 이직수당 지급, 비정규직 계약 갱신 횟수 제한 등이 따라붙어 있다.

어처구니없다. 장그래가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정부는 비정규직 2년 연장으로 답한 꼴이다. “아주 24개월을 꽉 쓰고 버려졌다.” 정규직 전환의 희망고문을 견딘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이 남긴 절규다. 상시적 업무에 대해서는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등 계약직 사용사유에 대해 엄격히 제한하지 않은 채로 기간만 늘리면, 청년들의 희망고문이 그만큼 더 연장될 뿐이다. 그러나 정부는 48개월 꽉 쓰이고 버려진 후에 청년들이 느낄 절망에는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에는 기업들이 정규직 노동자마저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요건을 완화하고 파견고용을 확대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장그래를 핑계로 정규직의 고용보호 수준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이다. 그야말로 ‘비정규직 양산 대책’일 뿐이다.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진짜 장그래의 삶은 없다. 정부가 진심으로 이 시대의 장그래들,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살리고자 한다면 ‘계약직 사용기간 연장’이 아니라 ‘계약직 사용사유 제한’을 대책으로 내놓아야 한다. 2014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정부는 2015년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다시 써서 가져오시길 바란다.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scottnearing8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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