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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43] 일어서는 노조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고, 조합원들 또한 투쟁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노동조합 활동이 더욱더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각종 소모임들이 조직되고 조합원 교육 역시 활발히 진행됐다. 매일 저녁 8시 이후에는 조합원들이 노동교실에서 각종 모임을 갖거나 교육을 받느라고 3·4층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1976년 봄 새 집행부는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대중씨 등 재야인사 12명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박정희 정권 퇴진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의 대통령선거 결과 소위 인권정책을 내세운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박정희 정권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됐다. 당시 재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카터의 인권정책에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박정희 정권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포드가 당선되기를 기대했던 터라 카터가 당선되자 매우 당황했다. 당시 박 정권의 인권탄압은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권력 유지에 커다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음을 감지한 박 정권은 카터의 취임을 전후해서 반정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은밀한 회유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세계정세 격변에 당황한 박정희 정권의 회유

어느 날 이소선은 중앙정보부의 박아무개라는 사람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 여사, 요즘 무척 힘드시죠. 그래서 저희들이 신경을 좀 써 봤습니다. 저희들의 조그만 성의로 아시고, 달리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요즘 아파트가 한창 유행이 아닙니까. 살기가 참 편하죠. 고민을 하다가 아파트 한 채 마련했습니다. 강남에 ‘장미아파트’라고 있는데, 함께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아파트의 평수가 넓으니까, 시가로 따져도 상당한 액수가 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소선은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태일이가 죽었을 때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자신을 회유하려 들더니 5년여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러한 공작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물리적인 탄압보다도 이 같은 금전적인 술책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이제부터 그 추악한 술책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진저리가 쳐졌다.

“이보시오, 우리 같은 사람이 그렇게 커다란 아파트에 어떻게 살 수 있겠소? 나는 그런 아파트는 꿈에도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내가 왜 실없이 남한테 공짜로 집을 얻는단 말이요?”

일언지하에 잘라 말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 나오다시피 뛰쳐나와 버렸다. 이후에도 그는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아파트를 이소선의 명의로 해 놓았으니, 언제라도 가서 살면 된다면서 아파트의 호수까지 알려 줬다.

그런데 이와 같은 회유가 이소선한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972년 계엄하에서도 태광산업의 파업농성을 주도해 강력하게 투쟁했던 박문담한테는 3천만원을 제시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정보부의 이와 같은 야비한 회유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 어려운 시절 이 같은 탄압을 이겨 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소선은 버틸 수 있었다.

이제 막 들어선 집행부는 의욕은 넘쳤으나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고 또한 경험이 부족해 서툰 점이 많았다. 그래도 이들은 회유와 협박을 이겨 나갔다.

사업주에 폭행당한 노조간부

노동시간 단속을 하러 나간 조합간부가 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1976년 6월2일,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8시가 지나자, 조합 간부들이 8시 이후의 작업을 단속하기 위해 각자 담당한 사업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간 지 약 1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여보세요? 거기 노조사무실이죠? 저는 통일상가에서 일하는 조합원인데요, 지금 통일상가 B동 29호에서 공장장하고 그 부인이 조합간부를 넘어뜨리고 막 때리고 있어요. 빨리 좀 와 보세요!”

통일상가로 단속 나간 간부는 이숙희 교선부장인데 사용주측에서 노조간부가 여성이라서 얕잡아 보고 폭행한 것이다. 조합원들을 빨리 동원해서 현장으로 보내야 하겠는데 간부들은 몽땅 단속하러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이소선은 급한 김에 노동교실로 전화를 걸었다. 노동교실에도 방금 전화가 왔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동교실에서 모임을 하던 조합원들이 이승철 지부장과 함께 지금 통일상가로 몰려가기 위해서 준비 중이라고 했다.

혈기왕성한 남자 조합원들의 모임인 ‘바위솔’ 회원들이 조합원들을 이끌고 통일상가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 이소선은 노동교실로 갔다.

조금 있으니까 노동교실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이소선이 내다보니 조합원들이 폭행을 가한 공장장을 둘러싸고 데리고 오고 있었다.

노동교실의 응접실로 쓰는 방에 공장장과 그의 부인을 앉혀 놓고 지부장이 사건의 전말을 들으려고 하니까, 공장장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며 제대로 말을 못했다. 공장장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조합원들이 흥분해서 따지고 들었다.

“당신이 뭔데 노조간부를 넘어뜨리고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는 거야! 사장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공장장은 술 냄새만 풍기면서 씩씩거렸다.

보다 못한 공장장의 부인이 대답했다.

“누가 넘어뜨리고 머리채를 잡았다고 그래요? 자기가 굴러 떨어져서 그랬지.”

“이거 봐! 그럼 당신이 가만히 있었는데 우리 교선부장이 일부러 자빠져서 억지를 쓴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하고, 어떻게 된 내용인지 자초지종을 말해봐.”

교선부장은 통일상가 3층에 8시30분쯤 도착해 B동 29호 삼양사에 갔다. 아직도 작업을 하고 있어서 빨리 끝낼 것을 요청하고 다른 공장으로 향했다. 다른 공장을 둘러보고 9시가 넘어서 다시 삼양사로 갔더니, 그때까지 일을 시키고 있어서 8시 이후에 작업을 시키는 것은 단체협약 위반이니 빨리 끝낼 것을 거듭 요구했다. 공장장과 그의 부인이 요구를 거부하자, 교선부장은 전기 스위치를 꺼 버렸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자 공장장과 그의 부인이 교선부장을 마구 밀어서 넘어뜨리고 머리채를 낚아챘다.

통일상가는 건물이 낡은 데다 작은 건물들이 이리저리 달라붙어 있다. 내부는 어두침침하고, 거미줄 같은 통로는 후미진 구석에서 사람이 얻어맞아도 직접 옆에서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그때 마침 삼양사 위층에서 일하던 미상사가 내려오는 길에 싸우는 소리를 듣고 현장을 목격했다. 미싱사는 조합간부가 구타를 당하자 즉시 노조사무실과 노동교실에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삼양사 공장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지부장은 공장장에게 오늘 있었던 사건의 확인서와 사과문을 쓰고 가라고 했다.

술이 잔뜩 취한 공장장은 내키는 대로 말을 뱉었다.

“고발할 테면 고발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그런 것 못 써 줘!”

20대의 팔팔한 조합원들이 주먹을 쥐고 당장이라도 한방 먹일 것 같았다. 이소선은 흥분한 조합원들한테 절대 손대지 말라고 했다. 손끝만 대도 우리가 도리어 폭행했다고 뒤집어씌우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지부장은 침착하게 공장장을 달랬다.

“그렇다면 좋아요, 오늘은 일단 확인서만 쓰고 돌아가세요. 내일 술이 깬 다음에 얘기합시다.”

“못 써!”

“이것 봐? 당신이 오늘 했던 일만 사실대로 써 놓기만 하고 가란 말이야!”

지부장이 언성을 높이자 공장장의 부인이 끼어들었다.

“여보, 얼른 써 주고 갑시다.”

부인의 말에도 공장장은 못하겠다고 버텼다.

지부장은 부인한테라도 확인서를 일단 받아 놓고 보낼 생각으로 공장장 부인을 데리고 도서실 방으로 갔다. 도서실에서 공장장 부인이 확인서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여성 조합원 하나가 분에 못 이겨 울면서 억울함을 털어 놓았다.

“3년 전에 저놈의 집구석에서 일을 하다가 눈을 다친 적이 있었어요. 치료비를 요구했더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돈을 안 주는 거예요. 나중에야 겨우 천원을 주더라고요. 그 돈으로는 도저히 병원에 갈 수가 없어서 치료도 못 받고, 나는 눈병신이 됐다고요.”

이름이 임은숙인 그 조합원은 모임 때문에 노동교실에 왔다가 우연히 옛날에 일하던 공장의 공장장 부인을 만난 것이었다. 그 사람들을 보니 억울했던 옛날 일이 생각나서 이제야 마음 놓고 억울함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노동자 부려먹고 버리는 사업주

이소선이 임은숙을 보니 과연 한쪽 눈이 흰자위밖에 없어서 보기가 흉했다. 갓 스물을 넘긴 처녀가 한쪽 눈이 저렇게 됐으니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노동조합이나 노동교실을 모를 때니 혼자서 속만 태웠을 테지…. 거지한테 동냥을 주는 것처럼 던져 준 돈을 받아들고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워했을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조합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당한 것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은 인간도 아냐! 아무리 돈에 환장했기로서니 자기네 공장에서 일하다가 눈을 다쳤는데 치료비 천원이 뭐야, 천원이? 남의 눈 병신 만들면서 번 돈 죽을 때 다 싸가지고 살래?”

한편 옆방에 있던 공장장은 갑자기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큰소리가 터지자, 자기 부인을 때린다고 펄펄 뛰었다. 그런 게 아니라 당신 공장에서 일하다가 눈 병신이 된 아가씨가 억울해서 우는 것이라고 얘기해도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렸다. 술이 덜 깬 공장장이 갑자기 머리를 벽에다 들이받더니, 4층에서 뛰어내린다며 유리창을 깨려고 날뛰었다. 재빨리 조합원들이 공장장을 제지했다.

조합원들은 소동이 가라앉자 공장장 부인한테 확인서를 받아내고 얼른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나간 뒤, 공장장이 자기 부인을 길가에서 폭행한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부인이 확인서를 써 줬기 때문에 남편한테 얻어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부장이 부랴부랴 쫓아나가서 싸움을 말리고 버스를 태워서 보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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