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1990년 1월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도망갔다. 군 입대를 앞두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려고 발버둥 쳤다. 막내 이모가 운영하는 아파트에 딸린 슈퍼에서 배달 일을 했다. 추운 겨울 호별로 간단한 먹을거리를 배달했다. 10대 아이가 있는 집은 늘 ‘카스타드’를 시켰다.

89년 첫 출시된 롯데제과의 카스타드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가게마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당시 이모는 8개 들이 한 박스짜리 카스타드를 낱개로 4개 이상 팔지 않았다. 그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25년이 지난 오늘, 해태제과가 만든 '허니버터칩'은 카스타드보다 더한 인기몰이 중이다. 슈퍼마켓과 편의점 업주들도 물량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달콤 짭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은 꿀과 소금·버터가 결합해 만들어 냈다. 지난 19일자 일간신문들이 일제히 ‘허니버터칩’ 기사를 쏟아 냈다.

한겨레는 이날 사회면에 <어떤 과자길래 … 사러 가도 “다 팔렸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경제섹션 4면에 <하루 8만봉지씩 팔려 … 감자스낵 1위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몇몇 신문은 한 봉지에 1천500원 하는 허니버터칩이 인터넷에서는 5천원에 은밀하게 거래된다고도 했다. 조선일보는 출시 110일 만에 100억원 이상 팔렸다고 했다.

루머도 돌았다. "허니버터칩을 만드는 공장에 불이 나서 물량이 달린다"는 얘기가 사이버 공간을 타고 급속히 번졌다. 급기야 해태제과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사실무근이고 공장은 24시간 풀가동 중"이라고 했다. 다만 워낙 폭발적 인기 때문에 물량이 달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허니버터칩 품절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던져 준다. 그동안 우리 제과업체는 롯데와 오리온·크라운, 해태 등 빅3가 독과점을 형성해 안일하게 경영해 왔다. 투자와 혁신을 외면해 왔다. 포장만 살짝 바꾸고 질소를 잔뜩 넣어 가격만 올리는 꼼수를 자행해 소비자들의 불만이 가득했다.

새우깡은 71년에 태어났다. 올해로 만 43살이다. 오징어땅콩은 76년에 태어났으니 마흔 살을 앞두고 있다. 올 들어 홈플러스 매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과자인 홈런볼도 81년산으로 33살이다. 과자업계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수십 년 된 제품을 우려먹고 있다. 대신 꼼수만 늘었다. 과거의 히트 제품을 살짝 변형해 새 이름을 붙여 팔아먹기도 했다.

그사이 소비자들은 수입과자로 눈을 돌렸다. 초콜릿은 이미 외국산이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인도네시아산 초콜릿 ‘팀탐’ 등 동남아 제품 중에서도 우수한 것들은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심지어 라면도 수입산이 들어와 상당한 시장을 잠식했다.

허니버터칩은 늙은 과자에 의존해 수십 년을 지탱해 온 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큼 강렬하다. 허니버터칩은 제과업계의 안일한 경영 속에서도 소비자들이 혁신적인 제품에 즉각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러나 허니버터칩을 다룬 기사들은 한결같이 트렌드 중심의 가벼운 읽을거리 기사에 머물렀다. 이런 기사들은 마치 옛것에만 의존해 혁신하지 않는 제과업계의 안일한 경영처럼 안일한 글쓰기로 보인다. 비록 소재가 1천500원짜리 과자 한 봉지라도 더 깊이 있는 분석기사를 쓰는 언론이 있었으면 한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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