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던 한 노동자가 입주민의 폭언과 통제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여성계약직 노동자도 지속되는 성희롱과 정규직화 약속이 기만당한 것에 분노하며 소중한 생을 버렸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단지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비노동자를 모욕한 입주민은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고인에게 사과했고, 중소기업중앙회 간부들은 징계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두 사건은 예의 없는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차별과 모욕이 일상이 된 우리 사회의 문제다. 따라서 한두 사람의 사과와 징계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한국의 기업은 차별을 먹고 자란다. 기업은 노동자의 작은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서 더 낮은 임금, 더 나쁜 노동조건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여성이거나, 어리거나 혹은 나이가 많거나, 장애인이거나,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직접 차별하기도 하고 특정 업종으로 내몰거나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서 차별한다. 비정규직이 전 업종에 걸쳐 확산되는데도 비정규직이 되는 것은 마치 능력이 없어 그런 것처럼 왜곡한다. 직무의 중요도를 임의로 나누고, 어떤 직무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이 일을 하는 이들은 능력이 없어서라며 차별을 정당화한다. 사회적으로도 경비나 청소 등의 직무를 저평가하고 편견이 조장된다. 직무에 대한 저평가는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무시로 귀결된다. 기업들은 그런 사회구조 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임금과 부당한 대우를 정당화한다.

이런 사회적 편견이 정당화되는 이유는 ‘경쟁사회’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경쟁사회가 정당화되려면 ‘노력하면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적 차별과 편견과 부모들의 재력과 운에 의해 지위가 결정돼 버린다. 이럴 때 운 좋게 경쟁사다리 위에 위치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서비스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비용을 지불했으므로 ‘하녀처럼 부려먹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돈이 많은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물신화된 사고인가.

그런데 이것도 역시 ‘불안’의 다른 표현이다. 끝없는 경쟁에서 언제 밀려날지 모르기 때문에 남을 짓밟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일 뿐이다.

불합리한 차별에 저항하게 되면 살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은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아니, 순응이 마치 올바른 처세인 것처럼 설파된다. 고용노동부에서 펴낸 면접지침에 보면 ‘커피심부름을 요구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한잔의 커피도 성의껏 타겠습니다’를 모범답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성희롱조차도 수용하고 감내하는 것이 올바른 요령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모욕과 차별을 견뎌 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은 차별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차별에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차별은 확산되고 강고해진다.

그런데 중소기업중앙회 계약직 여성노동자와 압구정동 경비노동자는 그렇게 강고해지는 차별을 무감각하게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격 전체에 가해지는 모독을 거부했다. 매일매일 부딪치는 차별의 현장에서 자신의 인간됨을 주장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이것은 부딪침과 고통의 연속이다. 때로는 ‘인생은 원래 이런 거야’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모욕과 차별을 수용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사회의 벽은 너무나 큰데, 작은 개인이 자신의 자부심과 존엄성을 지키려는 과정은 쉽지 않다. 순응과 거부 사이에 괴리가 클수록 개인의 고통은 크고, 그래서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통해 차별에 대한 무감각이 결국 사회의 차별을 확대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해 왔음을 깨닫기를 바란다. 죽음을 택하면서까지 분노했던 그들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숨죽임을 깨우기를 바란다. 그 어떤 차별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람이 하는 일로 인격 전체가 모독을 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 있을 뿐이며, 우리 노동자는 모두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당하게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해고되거나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집단적인 저항을 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단지 임금과 노동조건을 올리기 위한 조직이 아니다. 노동자의 인간됨을 주장하고, 차별과 모욕을 일상화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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