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이슈를 꼽으라면 너도나도 비정규직 문제를 꼽을 것이다. 수치상으로 보더라도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비정규직이 800만명을 훌쩍 넘어선 상태이며 피고용자의 절반 이상을 넘어서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라 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이렇다 할 진척이 없다. 도리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비정규직 해결을 위한 법도 제정됐지만 효과가 별로다. 그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이 정도면 그간의 비정규직 투쟁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문제 해법은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정규직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정규직 전환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하는 사회적 노력이 강력해질 때 정규직은 현재의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벗어나야 할 그 무엇으로 볼까 아니면 지켜야 할 그 무엇으로 볼까. 누구나 인정하듯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의 위치를 지켜야 할 그 무엇으로 본다는 것은 현상유지에 집착한다는 것이며 현상유지에 집착한다는 것은 곧 보수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규직, 그중에서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의 하나로 전락해 있다.

나아가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의 존재에 대해 어떤 이해관계를 갖고 있을까. 불확실성 시대에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 정규직 입장에서 볼 때 비정규직이 있는 것이 좋을까, 없는 것이 좋을까. 모두가 정규직인 상태에서 구조조정이 단행되면 자신도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반면 비정규직이 존재하면 그들이 우선 구조조정될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위한 고용안전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규직은 내심 비정규직의 존재를 원한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의 존재와 관련해 정규직과 사용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정규직과 사용자 관계에서 어느 쪽이 정서적으로 가까울까. 안타깝지만 현실은 정규직과 사용자의 정서적 거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그것보다 가깝다.

변혁성은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하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함과 동시에 기성 질서와 자신의 이해관계가 뚜렷이 충돌한다고 믿을 때 발휘된다. 그런데 두 지점 모두에서 정규직은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동안 정규직이 변혁성을 상실해 왔음을 말해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은 의도와 무관하게 정규직의 보수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럼으로써 비정규직 해결마저도 구조적으로 어렵도록 만들었다. 생각해 보라. 사용자 입장에서 볼 때 정규직이 기성 질서 유지에 집착하는 조건에서 무엇이 아쉬워 비정규직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오히려 정규직의 보수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비정규직을 양산할 가능성이 크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화살표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향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화살표는 정규직 전환이 아닌 정규직도 함께 지향할 수 있는 대안의 지점으로 향해야 한다. 그럴 때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노동대중은 자본의 분할지배 전략을 극복하고 승리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

관련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진보진영 안에서 소위 자주파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민족 혹은 대미) 자주의 과제를 가장 중시하면서 핵심 과제로서 주한미군 철수를 꼽는 경우가 많다. 주한미군은 반드시 철수해야 하고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중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관건적 요소인지는 냉정히 따져 봐야 한다. 간단히 말해 주한미군이 철수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수 있을까. “주한미군 철수시켜 비정규직 해소하자”라는 식의 구호를 외칠 수 있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함께 지향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대안의 지점은 무엇일까.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한다는 전제 아래 결론만 이야기하면 돈 중심의 경제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돈이 아닌 사람이 목적이고 운동의 중심이며 권력의 원천을 이루는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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