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애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얼마 전 방송통신대 지역학습관에서 노사관계법을 강의하고 나서 있었던 일이다. 6시간의 출석수업 내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어떻게 제약하고 있는지에 관해 강의를 했던 터였다. 한 고령의 학생이 수줍은 듯 다가와서 강의를 들은 소감을 말씀하셨다. “저는 70년대에 원풍모방노조 활동을 하다 감옥소에도 10개월 다녀왔어요. 그런데 강의를 들어 보니 지금 노조 하는 사람들이 더 힘들겠네요.”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불법’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조합원 개개인까지 수십 수백 억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신종 노조탄압 관행이었다.

2003년 배달호·김주익 열사가 손해배상·가압류 소송을 이용한 노동탄압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던진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법시스템을 활용한 부당노동행위에 짓밟혀 왔다. 지난 6일 자살을 시도한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9월19일 법원으로부터 불법파견과 현대차의 근로자임을 인정받았지만 2010년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십 억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 젊은 노동자는 ‘법의 정의’는 멀지만 ‘법의 폭력’은 가까운 현실에 부딪혀 생의 절벽으로 떠밀리고 말았다.

대법원도 인정한 불법파견 활용에 따른 현대차의 책임을 요구하며 2010년 겨울 25일간 파업을 전개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현대차가 제기한 7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 중 1심 법원의 판결이 난 6건의 손해배상액만 184억2천만원이며,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2심 항소를 위한 인지대만 1억원가량을 납부했다. 오는 12월3일 부산고등법원에서 90억원이 넘는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 선고가 예정돼 있는데, 법원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경우 지회는 상고를 위해 다시 1억원 가까운 인지대를 마련해야만 한다. 만약 소송 비용이 없어 지회가 상고를 포기할 경우 18명의 조합원이 90억원을 현대차에 물어 줘야만 한다.

그런데 평범한 노동자가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현대차의 속내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현대차의 요구대로 지회를 탈퇴하거나 현대차를 상대로 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포기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청구대상에서 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정당한 권리행사를 막고 노조를 와해하려는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민사소송이라는 사법적 시스템을 활용해 국민의 기본적 인권 실현을 침해할 목적으로 제기되는 소송을 미국에서는 ‘전략적 봉쇄소송’이라 부르며, 이를 규제하기 위한 법리가 1980년대부터 발전해 왔다.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과 피케팅 및 불매운동을 전개하자, 사측은 노동자들에 대해 명예훼손·영업방해 및 거액의 손배배상을 청구했다. 법원은 사측의 소송 제기가 억압 또는 보복의 강력한 도구일 수 있고, 소송의 실제 결과와는 상관없이 피소자는 그 방어를 위해 막대한 법률적 비용을 감당하게 되므로 사람들에 대한 위축효과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정한 바 있다(1983년 Bill Johnson's 식당 사건).

이후 미국 법원은 이러한 종류의 봉쇄소송을 아예 조기 각하하거나 약식판단을 통해 기각하고 소송 비용을 제소자에게 부담하도록 하는 법리를 발전시켜 왔다. 나아가 각 주별로 전략적 봉쇄소송에 대한 규제입법이 이뤄져 2010년 현재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27개 주에 전략적 봉쇄소송 규제법이 존재한다.

논쟁의 공공적·정치적 성격을 기업의 경제적 권리에 관한 법률논쟁으로 변질시키고, 이를 통해 논쟁의 초점을 국민이 당한 피해에서 기업이 입었다고 주장하는 손해로 변질시키는 것이 전략적 봉쇄소송의 특징이다.

막대한 규모의 배상청구액은 소송의 실제 결과와 상관없이 기업에 성가신 목소리들을 침묵하도록 만들 수 있기에 미국에서는 이를 민주사회의 기본적 권리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규제하고 있다. 우리 법원도 노동자들의 권리행사와 노동 3권을 억압할 목적으로 제기되는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법리를 마련해 가야 할 것이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laboryun@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