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우리나라 성인들의 연간 평균 독서량은 9.2권이다. 한 달에 한 권도 안 읽는다. 나는 이 통계도 의심한다. 1년에 한 권도 안 읽는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민은 미국과 일본·프랑스 사람이다. 이스라엘과 러시아 사람들도 책을 많이 읽는 축에 든다. 이 통계 역시 께름칙하다. 내가 본 미국 사람들은 통속소설이나 성인잡지를 주로 들고 있었고, 일본에서 내가 본 사람들은 만화책을 들고 있었다. 물론 만화책을 폄하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

무거운 책을 끼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단연 프랑스인을 떠올린다. 이미 70년대부터 책 소개 TV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누렸던 프랑스 사회다.

문학평론가 베르나르 피보는 73년 ‘따옴표를 여세요’를 시작으로 75~90년까지 프랑스 공영방송 FR2에서 책 비평 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프’(불쑥 말 걸기)를 진행했다. 91년엔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 ‘문화의 용광로’로 갈아타고 다시 10년을 더 달려 무려 27년 동안 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하루에 무거운 책 한 권을 읽어 내는 피보 때문에 서점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던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보의 거침없고 직설적인 서평에 목말라하며 금요일 저녁 9시 반이면 어김없이 FR2를 틀었다.

피보의 진행방식은 작가를 모셔 놓고 신간홍보나 신변잡기를 듣는 우리의 ‘TV 책을 말하다’ 같은 프로그램과 많이 달랐다. 피보의 가혹할 만큼 혹독한 비평은 자주 논쟁을 불렀고, 그만큼 프랑스인의 사유는 깊어 갔다.

피보가 90년 6월29일 ‘따옴표’ 프로그램을 끝내자 르몽드와 르피가로 등 일간지들이 3~4면씩 털어 이 프로그램이 프랑스 사회에 끼친 영향을 보도했다. 27년을 글 감옥에서 보낸 피보는 “이제 하루 종일 책을 보는 일에 지쳤다”고 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피보는 “출판업자들의 로비와 압력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프랑스는 참 이상한 나라다. 한국 교육방송이 한때 프로그램 이름으로 사용한 ‘톨레랑스’(관용)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지만 유색인종에 대한 냉소와 까칠함은 자주 문제가 된다.

2005년 가을 파리 외곽에서 큰 소요가 일어났다. 같은해 10월27일 파리 북쪽 외곽에서 10대 무슬림 소년 2명이 경찰 검문을 피해 달아나다가 감전사하면서 이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불타는 파리 주택가 시위가 21세기 파리에서 한 달 동안 벌어졌다.

2003년 여름엔 폭염으로 파리와 수도권에서만 2만명의 빈민이 죽었다.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문명국가를 자부하는 프랑스 수도에서 일어났다.

프랑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매우 높지만 여성 정치인은 아프리카 후진국보다 그 비율이 낮다. 피로 만든 평등주의가 있지만 정치·사회문화·경제의 최상층은 늘 그랑제꼴과 국립행정학교를 나온 한줌의 소수 엘리트가 독점한다.

한국계 입양아 출신 플뢰르 펠르랭(41)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모디아노의 책을 안 읽었다고 답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조선일보 29일자 18면, ‘佛 문화장관이 책을 안 읽는다고?’)

펠르랭 장관은 모디아노의 책 가운데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머뭇거리면서 “지난 2년간 수많은 서류와 보고서·기사를 읽느라 너무 바빠 모디아노 작품뿐 아니라 다른 소설책도 거의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단다. 이를 두고 당장 사임하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녀를 옹호하는 주장까지 겹쳐 논란이다.

프랑스인의 숨겨진 순혈주의가 유색인종 장관에게 표출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언론은 보수든 진보든 대부분 팰르랭 장관 편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 초엘리트 코스인 국립행정학교를 나온 펠르랭 장관이 소설 읽을 시간이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녀가 ‘문화’장관인 건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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