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코어’라고 들어 봤는지 모르겠다. 놈코어가 올가을 최고의 패션 유행어라고 해서 구글 검색창에 입력했더니 무려 61만9천개의 검색어가 떴다. 그중 대표적인 웹문서 몇 개를 읽어 봤다. 공통된 핵심어는 ‘평범’과 ‘스티브 잡스’였다. 그러니까 ‘평범함’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바로 놈코어고, 대표적인 인물은 스티브 잡스라는 얘기다.

그런데 어째 좀 아이러니하다. 패션이란, 패션계가 선도하는 유행이란 결국 남과 나를 구별하기 위한 1차적 도구 아니던가. 그런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죽어도 죽지 않는 비범한 남자 스티브 잡스이기 때문일까. <보그>부터 <중앙일보> <위키트리>까지 오프라인·온라인 할 것 없이 매체마다 놈코어 트렌드를 소개하고 있는 가운데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도 ‘#normcore’라는 태그가 달린 사진이 수천 장씩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다. 트렌드 전파속도가 LTE급이라고 하더니 유행에 민감한 이들의 너스레만은 아니었구나 싶다.

반가운 건 패션이나 유행, 혹은 의전 매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평소 자기 신념대로 편안하게 입는 이들에 대한 존중감이 바로 이 놈코어 트렌드에 담겨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자사의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가 평소대로 검정색 터틀넥 티셔츠에 청바지·운동화 차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스티브 잡스이니 망정이지 그 차림에 망치를 들면 동네 목수처럼 보일 것이고, 앞치마를 두르면 분식점 사장님처럼 보일 수 있는 차림이었다.

21세기 제품 디자인 역사상 미학적으로 가장 쿨한 컴퓨터와 모바일 폰을 동시대 인류에게 남긴 그였지만 그 자신은 조금도 멋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옷차림은 조금도 럭셔리해 보이지 않았고 그 일관적인 평범함이 거의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혹시 스티브 잡스도 윌리엄 깁스의 책을 읽었을까. 표준을 뜻하는 ‘norm’과 핵심을 뜻하는 ‘core’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놈코어(normcore)라는 단어를 처음 쓴 SF소설의 대가 윌리엄 깁스의 소설 말이다.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윌리엄 깁스는 컴퓨터적 가상현실의 문제를 최초로 다룬 SF 고전 <뉴로맨서>(1984)를 쓴 소설가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지금은 너무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도 그였다. 그런 그가 2003년 <패턴 인식>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의 옷차림을 묘사하며 놈코어 개념을 처음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검정 티셔츠, 동부의 사립 초등학교에 납품하는 브랜드에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회색 브이넥 풀오버, 오버사이즈 블랙 리바이스 501!”

구글 검색기로 윌리엄 깁슨의 사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놈코어는 그 누구도 아닌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신조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동네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옷차림의 남자. 그러나 중고 타자기로 당대 가장 하이테크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SF소설의 진정한 대가 말이다.

리바이스든 유니클로든 평범한 이들의 옷장을 열면 언제든지 있을 것 같은 기본 아이템을 별다른 노력 없이 그냥 대충 툭 입어 낼 수 있다면 당신도 이미 놈코어다. 오래 입은 낡은 청바지·니트·체크무늬 셔츠·맨투맨 티셔츠·운동화·스웨터·트레이닝 팬츠·야구 모자·바람막이 점퍼·청재킷처럼 패션이나 트렌드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조차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기본 아이템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패션 트렌드가 바로 놈코어이니까.

며칠 동안 똑같은 양복 차림으로 세월호 구조현장에서 뉴스를 진행하던 손석희 앵커처럼 유행이나 값어치와 관계없이 오랫동안 애착을 느낀 자기만의 시계(손석희 시계로 알려진 카시오시계처럼)가 있다면 더욱 근사해 보일 것 같고. 그리고 <뉴욕 매거진> 표현대로 ‘자신이 전 세계 70억 인구 중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한 패션’이 바로 놈코어라면 경제불황·기후변화·자원부족·핵확산 등 70억 인구가 직면한 딜레마 안에서 ‘보다 더 중요한 가치’ 혹은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뼛속까지 진정한 놈코어일 것이고.

칼럼니스트 겸 작가 (@kimkyung19)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