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기 평화새마을교실. 일곱 평 정도의 노조사무실에 수강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전태삼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 음모를 관철시킨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엄청난 부정선거를 저지르고도 야당을 가까스로 제쳤다. 그런 만큼 공화당의 집권은 매우 불안정했다. 부도덕한 방법으로 장기 집권한 정권에 이미 등을 돌린 민중들은 생존권 투쟁 방식으로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전태일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증가했다. 통계에 의하면 전태일 분신 직후인 71년에는 노동쟁의가 전년에 비해 10배가 넘는 1천656건을 기록했다. 비록 조직적인 투쟁은 아니었지만 투쟁의 양상이 폭발적이었다.

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은 농촌에서 더 이상 견디다 못해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마땅한 일자리는 고사하고 찬 이슬 피할 집 한 채 없이 도시의 변두리 판자촌에 내동댕이쳐졌다. 땅 투기로 돈벌이에 눈이 먼 정부당국은 서울시 변두리에 거주하고 있는 빈민들의 집을 강제로 철거해 14만5천여명을 현재의 성남시에 해당하는 경기도 광주군으로 내몰았다.

새로운 정착지라는 말은 한낱 기만에 불과하고 생계를 이어 나갈 방안이 없던 상황에서, 당국의 비호 아래 온갖 사기·협잡·폭력이 난무했다. 땅값이 폭등하자 이들 주민은 생존의 벼랑에 몰리게 됐다. 정부 당국의 야만적 처사에 대한 이들의 사무친 증오는 격렬한 투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부정하게 재집권한 독재정권, 빈발하는 시위


71년 8월10일 오전 10시께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명은 탄리 성남출장소 뒷산에 모여 양택식 서울시장을 면담하려고 빗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들은 7월7일 ‘광주대단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7월14일 서울시가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분양지 유상불하 통지서를 발부하자 주민들은 대책위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서울시에 진정을 하는 한편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민들은 대책위를 ‘투쟁위원회’로 바꾼 다음 8월10일을 ‘최후 결정의 날’로 정했던 것이다.

사건 당일 이른 아침부터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대열에’라는 제목의 전단을 집집마다 뿌렸다. ‘배가 고파 못살겠다’, ‘토지불하 가격 인하해 달라’, ‘일자리를 달라’는 내용이 적힌 피켓과 플래카드를 준비했다. 주민들의 강경한 움직임에 당황한 서울시는 양 시장과의 면담을 10일 오전 11시에 주선하겠다고 제의했다.

오전 11시40분까지 양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주민들의 감정은 폭발했다. 격분한 주민들은 성남출장소와 관용차·경찰차 등을 불태워 버렸다. 오후 1시45분께 서울시경과 경기도경 소속 기동경찰 700여명이 나타나 최루탄을 발사하는 등 진압에 나서자 주민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일부는 광주경찰서 성남지서를 때려 부수고, 일부는 차량통행을 금지시켰다. 이 사건은 오후 5시께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6시간 만에 끝났다.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했고, 주민 가운데 23명이 구속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9월15일 오전 11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또 하나의 노동자 투쟁이 폭발했다. ‘한진상사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투쟁위원회’ 회원 300여명이 KAL빌딩 앞에 집결, 체불 노임 149억원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빌딩 안으로 진입해 방화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오후 2시40분께 다수가 경찰에 연행됨으로써 5시간여 만에 해산당했다.

청년학생들의 반독재투쟁도 가열하게 전개됐다. 71년 봄부터 시작된 교련반대투쟁은 2학기에 접어들면서 한층 격렬해졌다. 교련철폐와 현역교관 철수를 부르짖는 시위가 전 대학가를 휩쓸다시피 했다. 박 정권의 대응은 무지막지했다. 10월5일 새벽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30여명이 고려대에 난입해 학생 5명을 불법 연행,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10월12일에는 국방부와 문교부의 두 장관 명의로 "교련을 거부하는 학생은 전원 징집하겠다"는 내용의 담화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학생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학생들은 교련철폐 시위에 더해 ‘무장군인 난입사건’ 규탄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10월8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급기야 ‘중앙정보부 폐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11일부터 10월14일까지 전국에 걸쳐 대학생 5만여명이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고대 난입군인 처단’을 요구했다.

박 정권은 10월15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했다. 서울시내 8개 대학에 위수군인이 진주해 1천889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 중 119명이 구속됐다. 문교부는 시위주동 학생들을 제적하도록 각 대학에 강요해 23개 대학에서 117명을 제적했고, 이들을 즉각 입영 조치했다. 각 대학의 동아리 74개를 해체하고, 서울대 법대의 ‘자유의 종’ 등 14종의 간행물을 폐간시켰다.

독재에 대한 항거는 그동안 권력의 횡포에 침묵만 지켜 오던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서도 들불처럼 번져 갔다.


국가보위법 전격 통과, 노동 3권 박탈


언론인들은 5월15일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이들은 행동강령을 통해 △책임성 있는 취재·보도 △관계기관의 불법 부당한 연행의 일체 거부 △기사 삭제에 대한 타당성 확인 △정보기관원의 언론기관 상주·출입 배제를 요구했다. 언론인들은 행동강령을 발표함으로써 언론이 권력에 의해 어떻게 탄압받아 왔는가를 아울러 폭로했다.

그해 7월 검찰이 잇따른 무죄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판사 2명을 구속해 뇌물수수 혐의로 영장을 신청하자 서울 형사·민사지방법원 판사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고 사법권 침해사례 7개항을 공개했다.

이러한 사법권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전국 415명의 판사들 중 153명이 사표를 제출하고 사법부의 독립과 압력배제를 결의했다. 대학교수들도 대학자주화 선언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박정희 정권은 민중으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고 있었다. 각계각층 민중은 독재자에 대한 공세를 강화시켜 나갔다. 독재권력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보다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15일 위수령에 이어 12월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나라를 극심한 공포상태로 몰아넣었다. 12월27일에는 민중에 대한 억압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속셈으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전격 통과시켰다. 대통령에게 엄청난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법이었다.

대통령은 해당 법에 따라 △경제규제를 명령하고 △국가동원령을 선포하고 △옥외집회와 시위를 규제하고 △언론·출판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하고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단체교섭권을 규제하고 △군사상의 목적을 위해 세출액을 조정할 수 있게 됐다.

그중에서도 제9조 단체교섭권 등의 규제 조항에는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고 그 조정결정에 따라야 하며 대통령은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국영기업체, 공인사업,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단체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한마디로 독재권력이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강화하고, 군사력 증대를 위해 필요한 어떤 조치라도 발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은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박 정권은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처럼 폭력적인 조치를 취하는 한편 기만적인 통일놀음을 벌여 정권연장에 이용했다.

독재정권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노동 3권을 박탈당했지만 노동자들은 생존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72년 연합노조 서울시지부에서는 서울시의 노조활동 방해 및 근로조건 저하에 맞서 총사직을 결의했다. 5월10일에는 전국 은행원들이 당국의 노사협의제 무시, 급여제도 개악에 항의해 넥타이를 하지 않고 근무하는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에 재무부측은 국가보위법을 적용하겠다고 경고했다.


탄압에 맞서는 노동운동


보위법과 유신치하에서 가장 끈질기고 치열하게 투쟁한 조직은 한국모방(이후 원풍모방)이었다. 4월10일 한국모방의 퇴직근로자 40여명이 ‘퇴직금 받기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퇴직금을 지불하지 않는 회사측을 고발하는 고발장을 노동청에 제출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8월9일 한국모방 노동자들은 노조 지부장 입후보자 지동진씨에 대해 전출명령을 내린 것과 관련해 철회 등 4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했다. 73년 6월 회사가 도산위기에 처하자 노동자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회사 이사진으로부터 회사운영권을 인수,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노조에 의한 회사운영이 시도되기도 했다.

한국모방이 원풍모방으로 이름을 바꾼 후 이 같은 훌륭한 투쟁이 밑거름 역할을 했다. 원풍모방노조는 70년대의 대표적인 민주노조로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유신정권은 청계피복노조를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물리적인 탄압은 일상적이었다. ‘국가안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면서 노동운동을 억누르는 한편 ‘공장 새마을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왜곡했다. 언론이나 각종 행사·교육을 통해, 그리고 노총이나 노조 상층간부를 통해 기만적인 노사협조주의를 강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조활동은 위축되고, 운동을 통해 대중적인 힘으로 전진해 나가기보다는 매사를 사무적이고 행정적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성을 얼핏얼핏 드러내고 있었다.

청계피복노조는 72년 들어 조합원 교육사업을 비중 있게 펼쳐 나가기로 했다. 시장상가 취업근로자의 80%를 차지하는 여성근로자들은 자신의 정당한 권익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여건마저 갖추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인격과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노조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야간 교육과정을 운영하기로 했다.

72년 5월22일 지부사무실에 여성근로자 50명을 대상으로 중등기초과정을 가르치는 ‘평화새마을교실’을 열었다. 애당초 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하기로 하고 인원을 모집했는데 응모자가 200명이나 됐다. 교육장소인 노조사무실은 7평밖에 안 됐기 때문에 50명도 수용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대개 초등학교밖에 졸업을 못하고 곧바로 공장에 취직했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누구보다도 강했다.

할 수 없이 신청자 200명 중 50명을 선발하고 이들 중에서 20명은 차기에 우선적으로 배려할 것을 약속하고 30명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이 진행되는 기간 중 노조는 교실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계기관에 백방으로 교섭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9월15일 정인숙 부녀부장이 모범근로여성으로 뽑혀 대통령부인 육영수가 마련한 청와대 모임에 초청됐다. 이 자리에서 육영수가 정인숙 부녀부장한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정 부장은 지금 당장 근로자들이 공부할 교실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육영수는 그 자리에서 노동청장한테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신청자 쇄도하는 노동교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노동교실 설립추진은 빠르게 진행됐다. 10월13일 노동청 상황실에서 노동청장을 비롯해 노동청 직원 8명, 각 상가대표 31명, 그리고 노총 사무총장·연합노조 위원장·청계피복노조 지부장 외 3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계피복 새마을 노동교실 설치 간담회 개최 및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2월5일 청계천 근처 각 시장별로 노동교실 설립 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업주총회를 소집해 노동교실 설립취지를 설명하고 찬동결의를 받았다. 같은달 15일에는 각 사업장별로 새마을 노동교실 설립기금 350만원을 할당해 징수에 착수했다. 73년 5월20일까지 258만원이 징수돼 동화시장 옥상에 50평 규모의 건물을 장기임대 계약하고 내부시설 일체의 비품을 ‘아프리’에서 지원받았다.

5월21일 노동교실 개관식을 앞두고 노조는 초청장을 만들어 그동안 청계피복노조에 관심을 보여 준 분들을 초청하기로 했다. 초청장을 가능하면 정성스레 만들려고 없는 돈에 색깔을 넣어서 인쇄를 했다. 그 색은 자줏빛이었다.

개관식 날 노동청 관계자, 노총 관계자, 사용주 등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러 왔다. 이날 <중앙일보>는 노동교실 개관을 두고 ‘전태일 기념회관’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관계기관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영수가 지시해서 어쩔 수 없이 노동교실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것이 자기네들 뜻대로 이용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하루빨리 지우고 싶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된다면 공연히 노동자들한테 멍석만 깔아 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일이 벌어졌다.

노동교실이 있는 동화시장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급기야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이소선은 노동교실을 개관하는 날인데 웬 사람들이 싸우는가 싶어 내려가 봤다. 거기에 함석헌 선생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엄연히 청계피복노조에서 초청을 해서 온 사람인데 왜 길을 막는 거야!”

함 선생이 초청장을 흔들어 대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당신을 초청했습니까?”

함 선생을 가로막고 있던 덩치 큰 기관원들이 몸으로 벽을 쌓고 물었다.

“내가 초청했어! 세상에 초청한 사람을 그렇게 무례하게 가로막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소선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기관원들에게 소리쳤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함 선생을 들여보내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다고 난리였다. 이소선은 어떻게 해서든지 함 선생을 개관식장까지 모셔가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사람 벽을 쌓아 꼼짝도 못하게 이소선을 막았다. 결국 아쉽게도 함 선생은 식장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이소선은 화를 삭이면서 개관식을 지켜봤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