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욱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It’s the economy, stupid!(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은 이 구호로 부시를 누르고 당선됐다고 한다. 지금은 일종의 관용어구 비슷하게 돼 여러 버전(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일자리야 등)이 사용되고 있다. 다소 진부하게 돼 버린 위 표현을 사용해 “바보야, 문제는 회계야”라고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회계장부상의 숫자 하나가 노동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선 정리해고 사건은 회계 분석이 사건 결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건은 유형자산 손상차손이 적정하게 계상된 것인지가 주요 쟁점 중 하나다. 과다계상된 유형자산 손상차손을 제거하고 보면 부채비율은 561%에서 187%로 감소한다.

회사가 1심에서 제출한 감사조서와 2심에서 제출한 감사조서가 상이해 1심 법원을 속이려고 허위 조서를 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최종 조서라고 제출한 2심의 감사조서도 회계기준에 맞지 않게 작성됐다. 2심 조서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서울고등법원 판결에서 적절하게 판단한 바 있다. ㈜PSMC(풍산) 정리해고는 기말재고 산정의 적정성, ㈜KEC 정리해고는 조업도 손실 등이 쟁점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손해배상 사건도 마찬가지다. 항소심이 진행 중인 쌍용차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 회계법인이 수행한 1심 감정 결과 검증을 위한 회계자료(예 : 계정별 원장 등) 제출범위를 두고 영업비밀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고, KEC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에도 공시된 회계장부와 법원에 제출된 회계장부가 불일치해 논쟁이 되고 있다.

한편 대법원이 통상임금 사건에서 기이한 기준(신의성실 원칙)을 새로 도입하는 바람에 최근에는 임금 사건에서도 기업의 재정 현황에 대한 분석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처럼 회계 문제는 노동자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소송에서 직접적인 쟁점으로 다뤄지고 있다.

소송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임금교섭에서 회사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근거를 만들거나 혹은 구조조정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회사의 재정상태와 이후 전망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회계자료 검토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의 재무제표와 외부감사인의 감사보고서를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업이 외부감사인을 선택하도록 하는 자유수임제 실시 이후 외부감사인의 독립성이 크게 약화됐고, 이는 허위(내지 부실) 감사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독립적으로 감사를 수행해야 하는 감사인(회계법인)이 기업들로부터 컨설팅 등 일감을 받는 을(乙)의 위치에 있고, 감사를 받는 기업들이 일감을 주는 갑(甲)의 위치에 있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다.

소위 4대 회계법인(삼일·삼정·안진·한영)이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의 경우 이들 회계법인이 10대 그룹 유가증권시장 상장 계열사 외부감사의 96.4%를 담당하고 있었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의 회계부정 문제에 회계법인 4대 회계법인 중 3곳이 관여돼 있을 정도다.

지난해 금융감독원 설문조사에 의하면 외부감사인의 73%가 "기업회계가 투명하지 않다"고 밝혔는데, 그와 정반대로 기업 경영진(CEO)의 75%가 "기업회계가 투명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이라도 제대로 감독을 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고, 쌍용차 사건 같은 경우를 보면 오히려 금감원이 범죄행위를 덮어 주는 듯하다. 외부감사 대상 기업이 이럴진데, 외부감사 대상이 아닌 기업은 말할 나위도 없다.

회계라는 것 자체가 그 성질상 추정(推定)에 근거한 것이 많기는 하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은 허위(내지 부실) 재무제표와 감사보고서가 여전히 많은 것 같고, 이것이 노동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리해고·손해배상·임금청구 배척의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다. 노동조합은 기업회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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