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길 역사연구가

얼마 전 진보진영 안의 이른바 ‘자주파’에 속하는 중견 활동가를 만났다. 그는 한국 사회의 성격에 대한 과거의 견해를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저는 여전히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 예속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래요. 증거가 뭐지요?”

“주한미군과 한미FTA, 두 가지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한미FTA가 한국경제를 미국에 예속시키는 제도적 장치라는 뜻이군요.”

“그렇지 않나요?”

한미FTA가 발효된 지 3년 가까이 되고 있다. 한미FTA가 어떤 영향을 야기할 지를 가늠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만큼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래서 한미FTA가 실제 어떤 영향을 미쳐 왔는지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먼저 <한겨레> 홈페이지에 들어가 한미FTA 관련 기사를 검색해 봤다.

어라! 이상하네! 한미FTA 영향을 다룬 기사가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은 한 건도 없었다. 가장 최근 기사는 지난해 6월 게재된 것인데 한 연구단체에서 한미FTA로 인해 의료기기 가격 상승이 우려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는 내용이었다.

적어도 지난 1년 동안 기사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미FTA가 이슈화될 만한 사안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한미FTA가 생각했던 것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말이다.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찬반을 둘러싸고 극심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찬성과 반대 진영 모두 극단적이리만치 정반대의 시각을 드러냈다. 찬성론자들은 한국보다 규모에서 적어도 10배나 큰 미국시장으로의 자유로운 진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한미FTA 체결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나를 주고 열을 얻은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10배나 힘이 센 미국에 한국시장을 완전 개방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헤비급과 밴텀급 선수가 체급 무시하고 링 위에 올라가 시합을 하는 격이라는 논리다. 한마디로 찬성론자들은 한미FTA 대박론을, 반대론자들은 쪽박론을 펼친 것이다.

진보진영 일부는 한미FTA가 한국경제를 미국에 예속시키는 참담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했다. 이러한 노력은 주술적 효과를 낳으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미FTA가 대미 예속의 장치라는 것에 대해 맹목적 믿음을 갖도록 만들었다.

추진 과정에서 찬성론들이 최상의 결과를, 반대론자들이 최악의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추진 단계에서 벗어나 발효된 시점에서 극단적 논리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발효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보다 실제적 관점에서 진행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문제점을 보안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 발목을 잡고 있는 이념적 접근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현실에서 한미FTA는 한국 경제에 날개를 달아 주거나, 한국경제를 예속의 수렁에 빠뜨리는 양 극단에서 움직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진보와 보수 너나없이 한미FTA는 이념의 끈에 묶여 신화 속을 헤매고 있는 듯하다. 면밀한 추적과 정책적 보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다.

필자는 자유무역의 신봉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무역 비판론자에 가깝다. 특히 한국의 지배 엘리트 사이에 존재하는 'FTA 만능주의'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자유무역의 확대가 교역 증가를 바탕으로 경제적 번영을 안겨다 준다는 명확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제프 매드릭 센트리재단 수석연구위원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수치상으로 나타난 번영조차도 혜택이 소수 최상위층에게로 돌아갔을 뿐이다. 반면 대다수 국민은 산업보조금 철폐와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 축소 등 자유무역 확대가 빚어낸 부산물로 인해 큰 희생을 치렀다.

오늘날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한 대표적인 신흥 경제국으로 중국·인도·브라질 세 나라를 꼽는 것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세 나라 사이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자유무역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무역과 경제적 번영 사이에 직접적인 함수관계가 없음을 입증하는 이보다 명확한 증거가 또 있을까. 참고로 중국이 한중FTA를 추진하는 것은 한국이 미국에 경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적 성격이 강하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형태의 맹목은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서둘러 한미FTA 신화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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