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공적연금 개편 시도를 두고 정부와 노동·시민·사회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올해 5월 기존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한 기초연금으로 바꾼 데 이어 최근 공무원연금 개편을 추진 중이다. 정부의 공적연금 개편은 재정안정화란 명분을 앞세워 공적연금 보장 총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7년 국민연금법 개정과 올해 기초연금 도입으로 연금액 대폭 축소를 경험한 노동·시민·사회단체는 공무원연금 개편이라는 새로운 파도와 맞닥뜨리게 됐다.

공무원연금 개편 두고 정부-노동계 대치

지난 26일 새누리당의 요청을 받아 공무원연금제도 개편방안을 마련한 김용하 한국연금학회장(순천향대 교수)이 전격 사퇴했다. 개편안이 정부·여당과 대기업 금융·보험사에 편향적인 내용으로 이뤄져 연금학회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일자 책임을 진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은 이날 연금학회 홈페이지에 게시한 글에서 "공무원노조 등의 반발은 감수할 수 있었지만 학회가 흔들리는 모습에 더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정책토론회에서 발제하려 한 안이 학회의 공식의견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도록 새누리당에 요청했고 다행히 안전행정부 차관이 새누리당 안이라고 해명했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연금 개편안을 두고 연금학회장이 사퇴할 정도 내부에서 논란이 컸던 것이다.

연금학회는 이달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새누리당과 공동으로 공무원연금 개편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더 내고 덜 받는 내용의 개편안을 두고 공무원노조들이 반발하면서 토론회를 열지 못했다.

공적연금인 공무원연금 개편을 두고 정부와 노동계의 대치가 심상치 않다. 공노총은 "최근 새누리당이 한국연금학회를 내세워 공개한 공무원연금 개편방안은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의 안"이라며 공무원연금 개편 배후로 청와대를 지목했다.

공노총 관계자는 "정부는 연금 재정 악화만 강조하며 공무원을 매도하는 방식으로 개편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공적연금제에 대한 해법을 내놔야 한다"며 "이런 차원의 연금 개편이라면 공무원들도 고통분담을 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공노총은 27일 서울역광장에서 공적연금 복원을 위한 대규모 총력결의대회를 개최했다. 공적연금 개악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는 11월1일 소속 조합원과 가족들이 참가하는 '공적연금 개악 저지를 위한 총궐기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노후 보장한다더니… 정부, 사적연금 활성화에 눈길

공무원연금 개편에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긴장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가 공적연금 포기 수순을 밟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기업이 퇴직연금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하는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대책에 따르면 2016년부터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기업은 퇴직연금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퇴직연금 가입은 단계적으로 확대돼 2022년에는 모든 기업이 가입해야 한다.

기획재정부는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은 짧은 가입기간과 낮은 소득대체율로 노후소득 보장에 충분치 않다"며 "노후소득 보장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 정부의 공무원연금 개편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연금학회가 공개한 공무원연금 개편안은 소득대체율을 현행 63% 수준에서 40%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개인 부담 보험료는 7%에서 10%로 늘린다. 낮은 소득대체율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이 공무원연금 앞에서는 달라진 셈이다.

공노총·공무원노조 등으로 구성된 공적연금 개악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가 정부의 공무원연금 개편을 사적연금 확대 정책으로 보는 이유다. 공무원연금 수준을 낮춰 노후 불안 심리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개인연금 등 사적연금 시장에 공무원들을 유입시키려는 계획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공적연금 보장 수준 세계 최하위

우리나라의 공적연금제는 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립학교교직원연금 등의 특수직연금과 국민연금·기초연금으로 구성돼 있다. 외국에 비해 도입은 늦고 보장성은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1년 발표한 '한눈에 보는 연금'(Pensions at a Glance) 보고서에 따르면 OECD 회원국 34개국 중 공적연금만 운영하는 나라는 12개곳이다. 우리나라와 룩셈부르크·핀란드·프랑스·일본·터키·슬로베니아 등이다. 이들 12개국의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은 우리나라의 42.1%보다 높은 평균 64%다.

OECD 34개국의 연금 소득대체율은 평균 63.6%인데, 공적연금·의무적 사적연금과 개인연금 등을 전부 포함해 계산한 수치다. 소득대체 수단의 차이에도 국가별 연금 소득대체율은 비슷한 수준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OECD 평균 소득대체율에 비해 20% 가량 뒤처지는 간격을 사적연금 활성화로 따라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사적연금 활성화 담론 누가 먼저 퍼트렸나

외국에서 사적연금이 활성화된 것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저성장-고실업으로 인한 연금재정 악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낮은 출산율·기대수명 상승·노인부양비 증가 등 선진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문제도 정부로 하여금 공적연금을 축소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은선 경기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우리나라에서 공적연금을 축소하고 사적연금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담론이 활성화된 때를 외환위기 이후로 봤다. 주 교수에 따르면 98년 세계은행은 우리나라에 차관을 제공하면서 국민연금 개혁을 주문했다. 공적연금의 급여를 축소하고 사적연금 발전을 위한 지원을 늘리는 내용이 권고안에 담겼다. 한국 정부는 세계은행의 권고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금개혁 담론은 세계은행이 제시한 프레임대로 만들어졌다. 주 교수는 "본격적인 급여지급이 시작되기 전부터 공적연금 재정건전성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됐다"며 "이후 이뤄진 정부의 연금개혁은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정치적·담론적 영향력을 확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사적연금으로 노후소득 보장 안 돼

외환위기 이후 근 20년 만에 사적연금 도입이 추진되고 있지만 그 결과가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영순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정치학)가 최근 펴낸 '코끼리 쉽게 옮기기'는 민간연금을 주축으로 한 연금제도로 노후소득 보장이 불가능한 이유를 영국 사례를 통해 보여 준다. 대처 정부 이전 영국의 공적연금 체계는 기초연금과 국가소득비례연금으로 구성돼 있었다. 대처 정부는 기초연금을 축소하고 국가소득비례연금의 소득대체율을 25%에서 20%로 줄여 공적연금의 매력을 떨어뜨렸다. 대신 직업연금 가입자의 보험료 일부를 정부가 납부해 주는 등 적극적인 사적연금 활성화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1987년 6대 4 수준이던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직업연금+개인연금) 비율은 94년 3.5대 6.5로 크게 역전된다. 사적연금의 보장성은 공적연금에 비해 낮았다. 81년 22%였던 연금소득자 빈곤율은 사적연금이 활성화된 91년 35%까지 치솟았다. 97년 제3의 길을 외치며 정권을 잡았던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는 정권 출범 초기에 대처의 민영화 노선을 계승하는 대신 저소득층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선에서 연금개혁을 추진했다.

대처부터 토니 블레어까지 민간연금 가입을 장려했지만 공적연금에 의존하는 사람은 오히려 늘었다. 민간부문 노동자 중 공적연금에만 의존하는 비율은 95년 46%에서 2004년 54%로 증가했다. 결국 노동당 정부는 2007년과 2008년 사이 기초연금을 소득과 다시 연동시키고, 가입률이 낮은 기존 개인연금을 대신할 저비용 적립방식의 의무가입 개인연금을 도입했다. 영국이 여태 걸어왔던 연금정책의 경로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국가가 개입해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뤄졌다.

김영순 교수는 "민간보험을 장려하려면 결국 공적연금을 빈약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며 "민영화를 통해 새로운 이해관계자들이 생겨나면 과거와 같은 공적연금체계로 돌아가기 어려운 만큼 연금 민영화는 시도부터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용돈연금 논란'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국민연금 신뢰 깎아 사적연금 부각"


현행 국민연금제는 소득의 9%를 보험금으로 내고 가입 기간 평균소득의 40%를 65세 이후 연금으로 돌려받는다. 직장가입자의 경우 본인과 사업주가 보험금의 절반을 각각 부담한다. 지역가입자는 본인이 전액을 내야 한다.

월평균 200만원을 받는 노동자는 18만원의 보험료를 매달 낸다. 이렇게 40년을 냈을 경우 소득대체율 40%인 80만원을 연금으로 받는다. 하지만 40년 동안 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험가입 기간을 20년으로 보면 받는 연금은 40만원이 된다. 매달 18만원씩 20년 보험가입을 한 사람이 90살까지 살 경우 25년간 40만원을 받게 되는 셈이다. 즉 일하는 동안 낸 보험료보다 연금으로 돌려받는 금액이 훨씬 많다. 이렇게 계산한 국민연금의 평균 수익률은 1.7배이다. 낸 돈의 1.7배를 돌려받는다는 것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국민연금을 용돈연금이라 부르는 것은 정부 비판에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부메랑이 돼 국민연금의 신뢰를 깎을 수 있다"며 "이는 사적연금으로 가길 원하는 정부를 오히려 도와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는 국민연금 개혁의 초점을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데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갈현숙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20년일 경우 실제 소득대체율은 2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제까지 재정적 측면에서 급여율과 보험료율이 조정됐다면 앞으로는 국민연금으로 보장돼야 할 소득대체율의 절대적 기준이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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