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1960년대 후반 평화시장 동료들과 함께한 전태일(왼쪽에서 두 번째). 전태삼



바보회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68년 말부터였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여공들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 평화시장 3만 노동자들이 다 같이 당하고 있는 작업환경이나 노동문제 따위에 '이상하게도'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표정이 어두운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1968년 말 전태일은 재단사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재단사들을 만나면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씩은 비록 힘이 없지만, 뭉쳐서 싸우면 우리도 큰 힘을 낼 수 있다"며 설득했다. 우리가 모여서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법조차도 지켜지지 않는 평화시장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하루에 8시간으로 명시된 작업시간을 평화시장에서는 하루에 14~16시간씩, 그것도 수당도 없이 일을 강요하고 있는 것, 매주 일요일마다 쉬게 돼 있는데도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하고, 더구나 나약한 여자 아이까지도 철야 작업을 시키는 것, 먼지구덩이 다락방 환경,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를 수 없는 낮은 임금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태일은 10명 남짓의 재단사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모임의 성격을 친목단체로 해서 차차 근로조건 개선 문제에 접근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잘 꾸려지지 않았다. 회원 중에 군대에 간 사람, 공장일이 바쁜 사람 등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모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태일은 비상한 열의로 재단사 모임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추진한 결과 1969년 6월 말 정식으로 모임이 창립됐다. 모임의 이름은 '바보회'라고 지었다.

"우리는 여태껏 인간이면서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기계 취급을 받아 왔기 때문에 우리는 바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철저하게 깨닫고, 우리의 삶을 개척하면 이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전태일은 자신들의 신세를 꼬집으면서 '바보회'라는 이름을 내건 취지를 설명했다. 바보회 회장은 물론 전태일이었다. 바보회는 여러 번 모임을 가졌다. 그 결과 바보회의 목표를 정할 수 있었다.

첫째, 평화시장 일대 3만 근로자의 근로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투쟁하는 것, 특히 8시간 노동제·주휴제 등.

둘째,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의 조직을 튼튼히 하고 확장해야 한다. 그리고 회원 각자가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본다.

셋째,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일.

넷째,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세우기 위해 독지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때부터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열성적으로 연구하고 만나는 사람한테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설명해 주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전태일은 사람들을 만나는 데 필요한 '바보회 회장 전태일' 명함도 만들었다.

그럼에도 바보회는 창립총회 이후 모임다운 모임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전태일이 평화시장 업주들한테 '위험분자'로 찍혀 직장에서 쫓겨나 바보회 재정이 어려웠고, 비교적 모임에 열성적인 회원 서너 명이 군대에 입대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근로조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설문지를 돌린 뒤로 작업이 더욱 어려워졌고 나중에는 사실상 바보회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전태일은 1970년 4월 삼각산에 올라가 낮에는 기도원 짓는 공사일을 하고 밤에는 지하실에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운동에 관해 연구했다. 그러다가 9월에 다시 평화시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동안 전태일에 대한 소문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또 업주가 바뀐 곳도 더러 있었으므로 취직할 수가 있었다. 그는 '왕성사'라는 공장에 취직했다.

노동청에 평화시장 근로실태 진정했지만…

 

▲ 전태일의 바보회 명함. 민종덕

전태일이 평화시장에 다시 나타나자 그동안 뿔뿔이 흩어졌던 바보회 회원들이 다시 모이는 계기가 됐다. 열두 명의 재단사가 자주 모임을 갖고 또다시 노동조건 개선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이들은 동양방송 '시민의 토론' 프로에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폭로하고, 요구사항을 발표하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으며, 서울시청과 노동청에 찾아가 호소도 해 봤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이뤄진 것이 없었다.

1970년 9월16일, 그동안 자주 모여 이야기를 나눴던 재단사들이 모여 '바보회'를 일신해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고 새 조직을 만들었다. 삼동친목회는 목적을 '연소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평화시장의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해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활동지침으로 삼았다.

삼동친목회는 평화시장 일대의 근로자들을 상대로 한 실태조사를 첫 사업으로 정했다. 이 설문조사를 토대로 해서 1970년 10월6일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평화시장 근로자 12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중 120명(95%)이 하루 14~16시간 노동하고 있고, 96명(77%)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걸려 있고, 102명(81%)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또한 전원이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눈곱이 끼는 안질에 걸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건강진단'이라고 받는 것이 '건강진단'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진단하는 의사도 믿을 수가 없다. 서류상의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엑스레이 촬영시 필름을 제대로 사용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노동청에 진정서를 낸 다음날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미칠 듯이 좋아했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신문보도가 나온 날부터 평화시장주식회사에서는 노동청에 진정서를 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10월8일 전태일·김영문·이승철 세 사람이 삼동친목회를 대표해 평화시장주식회사를 찾아가 작업시간 단축, 건강진단 실시, 임금 100% 인상, 다락방 철거, 환풍기 설치, 조명시설 개선, 여성 생리휴가 보장,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의 요구사항을 건의했다.

회사측에서는 "진정 내용은 알겠다. 지금 실정으로는 다 들어주기는 어려우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환풍기 설치와 조명 형광등 대체는 이뤄지도록 힘써 보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회사측의 답변은 말 그대로 "힘써 보겠다"는 것뿐이었다.

국정감사 끝나자 나 몰라라 하는 노동청

다음해 봄에 있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여론에 신경을 쓸 때였다. 삼동친목회의 진정 내용이 보도될 것을 우려해서인지 노동청에서는 허겁지겁 뒤늦게 실태조사를 하겠다느니,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를 고발하겠다느니 하는 소란을 피웠다. 그 며칠 뒤 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삼동친목회 회원들을 찾아왔다.

"자네들 모범청년이야. 그래서 근로자의 날에 표창을 주선하도록 해야겠네."

근로감독관은 전태일을 치켜세우며 은근한 회유책을 들고나왔다. 또 그때쯤 해서 경찰서에서 정보과 형사들까지 파견돼 회원들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10월 중순께 노동청 근로기준국장인 임정삼이라는 사람이 평화시장으로 이들을 찾아왔다.

"너희들이 깡패 모양으로 그렇게 직업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어서는 진정사항을 다 들어줄 수가 없다. 취직하도록 하라. 그러면 일주일 안에 다 개선해 주겠다."

이에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일주일 안에 다 개선해 준다'는 그의 약속이 너무도 반가워서 모두 일단 취직하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근로조건 개선은 조금도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을 찾아가서 약속했던 일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따졌다.

"진정 내용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해 봤으나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소집했다. 그는 감독관을 만나고 온 전말을 보고했다.

"이렇게 말로는 해결이 안 나겠으니 10월20일 노동청 정문에 가서 데모하자."

10월20일 노동청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가 있을 예정이니 그 기회를 이용해 노동청의 약점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원들 주변에 엄중한 사찰망을 펴고 있던 당국은 10월20일 데모 계획을 눈치챘다. 근로감독관이 다시 찾아왔다.

"앞으로 근로감독을 강력히 발휘해 업주들로 하여금 너희의 요구를 다 들어주도록 할 터이니 며칠만 참고 기다려 보자."

감독관은 애원하다시피 하면서 전태일에게 데모 계획의 중지를 요청했다.

"속는 셈 치고 또 한 번 기다려 볼 터이니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세요."

전태일은 이 말을 던지고 삼동친목회 회원들한테 돌아와 전말을 얘기했다. 그래서 계획했던 10월20일 데모를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노동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난 바로 다음날 전태일은 다시 근로감독관을 만났다.

"너희들 요구조건은 당초부터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무리한 것이니 그만 포기하라."

그는 있는 속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뻔뻔스럽게 나왔다. 전태일이 격앙된 어조로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렇게 타일러도 말을 안 듣느냐? 이제 국정감사도 끝났으니 그렇다면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감독관은 도리어 화를 벌컥 내면서 배짱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더 이상 속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10월24일 오후 1시에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길에서 데모를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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