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현 변호사
(민주노총 법률원)

우리나라에서 기술·연구·일반행정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직 공무원과 법관·검사 등 특수 분야 업무를 담당하는 특정직 공무원은 경력직 공무원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실적과 자격에 따라 임용되고 그 신분이 보장된다. 평생 공무원으로 근무할 것이 예정됨과 동시에 형의 선고, 징계처분 등의 사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휴직·강임·면직 등을 당하지 않도록 신분이 보장된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경력직 공무원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안심하고 담당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이를 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와는 무관해 보이는 일반 직장 안에서도 '사내정치'라는 말이 유행이다. 고용된 조직 내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기존의 보장된 권한을 넘어 개인적으로 주어진 권한을 행사한다. 이른바 ‘줄을 선다’는 것이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이상 직장 내에서도 일정한 편 가르기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내정치가 단순히 조직 내 신뢰성이나 융화감을 해치는 문제를 뛰어넘어 사내정치와는 무관한 노동자들의 신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A씨와 B씨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름 한 번쯤 들어봤을 보수단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 보수단체는 국가로부터 일정한 보조금을 지원받고 가입회원들의 상호 간 친목이나 수양·상부상조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공제조직의 성격을 띤다. 2년에 한 번씩 가입회원 중에서 선거를 통해 회장을 뽑는다. A씨와 B씨는 이 단체의 지방지부에서 20여년간 근무하고 있었는데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지부회장이 선출된 지 3개월 만에 해고됐다. 해고 사유는 ‘공금의 횡령 및 유용, 회계질서 문란, 업무소홀 및 직무태만, 직장 내 기강 문란’ 등이었다.

그러나 신임 지부회장이 횡령했다고 해고사유로 삼은 내용을 보면 이는 전혀 이들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전임 회장이 지부 내 모든 직원들에게 설이나 추석 격려금을 지급할 때 이를 받은 일, 상급단체 혹은 관할 내 유관단체에 격려금을 지급하라는 지시에 따라 이를 실무적으로 처리한 일, 선거관리 사무를 도와주고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격려금을 지급받은 일 등을 모두 공금 횡령으로 둔갑시켜 해고 사유로 삼고 있었다.

신임 지부회장이 A씨와 B씨에게 억지 징계사유를 만들어 해고를 하고자 했던 이유는 전회 지부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험이 있었는데, 이때 자신이 낙선한 이유가 지부 내 직원들이 자신에게 협조적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A씨와 B씨는 사내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20여년을 근무했지만 A씨와 B씨는 여전히 말단 직원에 불과했다. 선거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만한 위치도, 그런 역량도 없었다. A씨와 B씨는 자신들의 무고함을 백방으로 알려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징계사유의 실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상급관리자는 신임 회장에게 이미 줄을 서서 A씨와 B씨를 비위행위자로 몰아갔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A씨와 B씨에 대한 해고가 무효임을 다투는 소송이 벌써 1년 반을 넘기고 있다. 그사이 반대편에 서서 A씨와 B씨에게 허위의 징계사유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던 상급관리자도 현 지부회장으로터 토사구팽을 당했다. 지금은 A씨와 B씨의 억울함을 푸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A씨와 B씨 입장에서는 현 지부회장 못지않게 미운 사람이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니 그저 고맙다고 할 뿐이다.

A씨와 B씨는 자신과는 무관한 사내정치 놀음에 20여년간 성실히 근무했던 삶의 터전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해고가 무효라는 법원의 판결이 확정되더라도 피해를 온전히 보상받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부당해고에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는 데 소극적인 법원의 태도로는 현 지부회장에 그 책임을 묻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이래저래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노동자들뿐인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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