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석 기자

“상식적이지 않았던 산업재해보상제도, 가장이 쓰러져 망연자실했던 유가족들….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게 쉽지 않았고, 바꾸고 싶었던 것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손 내밀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던 사람들에게 저라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이제 시작했으니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정유석(53·사진) 재단법인 피플 신임이사장은 성공한 공인노무사이자 사업가, 산재전문가다. 91년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동료 노무사와 함께 산재보상 전문 노무법인을 열었다. 그리고 23년이 지났다.

정유석 이사장은 노무법인 산재와 노무법인 길을 창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달 현재 두 노무법인에는 노무사 15명을 포함해 전문인력 70여명이 일하고 있다. 서울 외에 전국 6곳에 지역지사를 두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창업주라는 명예직만 남기고 노무법인 활동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지난달 1일 비영리 재단법인 피플 이사장에 취임했다. 정 이사장은 “오랜 꿈을 실현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사재 털어 비영리 재단 설립


- 지난달 재단법인 피플 이사장에 취임했는데, 소감은.

“공인노무사로 23년을 일했다. 일하면서 만난 사람 상당수는 취약계층이었다. 특히 산재 관련 사건을 다루면서 큰 아픔을 느꼈다.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산재노동자의 사연도 안타까웠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레 가장을 잃은 유가족의 모습을 지켜보기가 쉽지 않았다. 심리적인 위로와 치료,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지만 우리 사회 누구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금보다 안정이 되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년 전인 2010년 6월 사재 10억원을 털어 비영리 재단법인 피플을 설립했다. 그동안 뜻을 모았던 다른 공인노무사와 변호사·직업상담사들이 도움을 줬다. 현업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다. 이제야 이사장에 취임했다.”

- 노무법인 산재를 창업할 정도로 산재전문 공인노무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산재보상업무를 시작으로 23년간 수많은 산재사건을 담당했다.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이것이 업무로 인한 것인지 개인적인 질병 혹은 사정에 기인한 것인지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산재보상제도는 너무 극단적이다. 사람이 판단하는 일인데도 산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업무상재해일 가능성이 1부터 100까지 있다고 치자. 이 중 1부터 50까지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반면 51만 돼도 전부를 받는다. 이게 상식적인가.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더라도 치료와 재활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런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하는데…. 나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 재단법인 피플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피플의 핵심가치는 뜻 그대로 사람이다. 사람 중심의 사회, 더불어 사는 사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회가 피플이 꿈꾸는 세상이다. 이러한 가치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피플을 설립했다.

처음 했던 사업이 산재노동자 무료상담과 유가족 지원사업이었다. 산재근로자 사회적응 프로그램과 고용서비스 지원사업을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수행하기도 했다. 무료 법률상담은 이주노동자나 취약계층까지 확대했다. 그러면서 시작한 또 다른 사업이 결혼이민자 지원사업이다. 산재와 관련한 연구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법·제도를 개선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하고 싶다.”

산재 유가족 지원·노동복지 사업 펼쳐

재단법인 피플은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피플평생교육원과 서울 관악구에 노동복지센터를 설립했다. 교육과 훈련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연계하는 사업을 펼치겠다는 계획이다.

- 사업의 폭이 넓다. 운영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2010년 피플 설립비로 낸 10억원으로 건물을 마련했다. 그래서 임대료는 절약하고 있다. 그럼에도 재단을 운영하면서 해마다 1억원씩 내고 있다. 재단 직원이 9명인데 인건비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다. 법률상담이나 사업진행은 거의 재능기부로 이뤄지고, 실제 돈이 필요한 사업은 사업비를 지원받는 정부 위탁사업으로 진행한다. 내가 꿈꾸는 사업이 있지만 개인적인 능력 부족과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쉽게 말해 일자리 사업이다. 산재환자와 유가족들을 지켜보면서 ‘내가 당사자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다 생계까지 막막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었다. 당장 부닥치는 문제는 생계문제였고. 다친 사람은 재활을 통해 일할 수 있도록, 가장이 숨진 가족에게는 신속하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 주는 게 중요하다. 자활·훈련·연계 나아가 창출까지. 이것이 내가 꿈꾸는 일자리 사업이다. 좀 더 넓히면 산재노동자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지역 취약계층·고용취약계층인 청년까지 모두가 사업 대상자이자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이들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연계하고 그에 맞는 직업훈련을 제공한다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면서 살 수 있다. 그런 것을 옆에서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

정 이사장은 “그런 의미에서 설립한 게 관악구 노동복지센터였다”고 말했다. 관악구 노동복지센터는 지역 주민과 지역 비정규·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노동상담·법률구조·노동법교육·취업지원 같은 사업을 수행한다.

지난해 11월 개소식에는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었던 신계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관악구가 지역구인 같은 당 유기홍 의원, 유종필 관악구청장이 참석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영상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8개월여가 지난 지금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지역 일자리 사업 확대하고 싶다”

- 관악구 노동복지센터가 처음 의도했던 것만큼 잘 운영되지는 않고 있다고 들었다.

“시작은 서울시가 했다. 서울시는 지난해까지 25개 구 단위마다 한 개의 노동복지센터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해당 사업은 현재 중단된 상태다. 앞서 시작했던 성동·서대문·구로·노원구 등 4개 지역에 대해서는 서울시가 2억~3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설립 순서로는 관악구가 5번째인데, 사업이 중단되면서 예산지원을 못 받고 있다.

노동자 법률·고충 상담은 재능기부를 받아 무료로 제공하고 있지만 운영비는 내가 사재를 털어 충당하고 있다. 애초 목표했던 직업훈련과 취업알선, 일자리 창출·연결 같은 사업은 시작하지도 못했다. 이대로 문을 닫고 싶지는 않다. 노동복지센터가 제 역할을 하면서 고용취약계층과 구민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최소한의 사업비는 서울시가 지원해야 한다. 서울시의 전향적인 판단을 기대한다.”

- 앞으로 계획은.

“꿈은 많은데 아직은 능력부족인 것 같다.(웃음) 피플 이사장을 맡은 지 이제 2개월이다.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다. 혼자서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없으니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무언가를 하면서 성과를 보여 주고 싶다. 그래야지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산재 유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옆에서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내 삶의 기억이다. 먹고살기 바빠서 뒤로 미뤄 놓았지만 이제는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글·사진=김봉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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