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정규직이요.” 한 초등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물었더니 이렇게 정규직이 될 거라고 대답한 ‘초딩’이 있었단다.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삼성전자 등 대기업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것일 게다. 생산직이든 뭐든 가릴 것 없이 억대 연봉을 받는 귀족노동자라 알려졌으니 그런 정규직이 자신의 장래희망이라고 대답한 것이겠다. 장래에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신분을 대답해야 하는데 오늘 대한민국 어린이는 정규직이 자신의 장래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가 법으로 비정규직 차별 말라 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 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오늘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신분상 차별로 존재하고 비정규직에게 정규직은 꿈이다. 정규직이 장래희망이라도 중소·영세기업의 정규직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소·영세기업의 정규직은 대기업의 비정규직보다도 열악한 경우가 많다. 요즘 내가 대리인으로 소송하고 있는 임금청구사건에서 버스사업장의 운전기사들은 정규직이지만 1일 15시간을 근무해도 불법파견을 다투고 있는 현대차·기아차 등 대기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보다도 임금 등 처우가 못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말하라고 하면 버스운전사라고 대답한 친구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무도 정규직을 장래희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2. “비정규직을 차별하지 마라.” “비정규직 철폐하라.” 오늘 노동운동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사용자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비정규직을 사용한다. 정규직의 노동을 자신의 사업을 위해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의 노동을 사용한다. 때로는 사용자는 비정규직을 자신의 사업을 위해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에 따른 사용자로서 책임을 피하고자 사용자가 아닌 것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갖가지 장치로 우회해서 하청업체의 사업과 지시인 것으로 포장한다. 실질적으로는 원청 사용자의 사업을 위해 그의 작업지시에 따라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노동한다.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그것이다. 사용자에게는 원청 노동자나 하청 노동자나 자신의 사업에 사용하기는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은 사용자에게는 정규직과는 단지 임금·복지 등을 차별하는 것으로 인건비 절감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다를 뿐이다. 그러니 사용자에게는 비정규직 사용이 경영효율화 방안이다.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적게 주고 노동자로부터는 받는 것은 마찬가지니 보다 많은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고 그야말로 자본의 길이다. 그러니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노동의 대응책은 단순하다. 받는 만큼 주는 게 답이다. 사용자는 정규직보다 적게 주고서 정규직만큼 받을 수 있는 길이니 자본은 그것이 제 길이라 하고 이 세상에서 자본의 자유를 노래한다. 그러니 그에 대응하는 노동의 구호는 이렇다. “비정규직을 차별하지 마라.” 동일노동 동일임금, 또는 동일취급. 이것을 우리는 오늘도 사용자에 요구하고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노의 길은 멀다고 절망한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반드시 쟁취해야 할 영원한 우리의 구호다.

3. “왜 아무도 없어요?” 지난 6월 말 자동차강판을 생산하는 한 제철소 순천공장을 순회하고서 본관 건물로 돌아오는데 금속노조 요구안이 현수막으로 내걸린 노조사무실이 보이기에 나는 비정규직지회 간부에게 물었다. 금속노조 기업지회에 편제돼 있는 제철소 정규직노조 사무실이었다. 역시 금속노조 소속인 비정규직지회는 공장 밖 순천시내에 사무실이 있었다. 순천지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불법파견 근로자지위확인소송사건의 현장검증이 이날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현장검증이 진행됐다. 몇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으니 판사가 거기가 거기 아니겠냐고 짜증을 내면 어쩌나, 이미 살펴본 공정과 다를 것 없지 않느냐고 사측대리인 말만 듣고 화를 내면 어쩌나하며 이날 나는 소심해져서 판사 표정을 봐 가며 현장검증을 하고 나왔다. 노조사무실을 보고서야 검증에서 정규직노조의 간부 조합원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현장검증하는 현장에서 보았던 회사직원들 중 조합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직원 중 누구도 비정규직 편에서 말해 주는 직원은 없었다. 심지어 노조조끼를 입은 정규직 조합원도 보지 못했다. 회사 작업복을 입은 회사 직원들만 있었다. 재작년 2월, 현대차 울산공장에 현장검증을 하러 갔을 때는 정규직노조 대의원 활동가들이 비정규직을 위해 현장검증에 나온 재판부 판사들에게 공정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 내용을 진술해 줬다. 현대차와 너무 다르다며 금속노조가 정규직지회에 어떻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금속노조가 어떻게 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나는 물었다. 그리고 답답하게 나는 물었다. “정규직노조에 협조 요청했냐.” 해 봤다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가 다른 사업장과는 다르다는 비정규직지회 간부의 대답이 돌아왔다. “비정규직을 차별하지 마라.” “비정규직 철폐하라.” 오늘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의 구호다. 그런데 그것은 아직도 진정으로 노동의 외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정규직까지 함께하는 투쟁의 구호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비정규직의 절규로,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투쟁의 구호로 외쳐지고 있다. 비정규직을 위해서 이 나라 노동자들이 외치는 정의의 구호로 아직은 되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권리를 위해 함께 외쳐야 할 투쟁의 구호로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장래희망이 정규직이라고 했다는 초등학생에게 그것은 묻고자 했던 장래희망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해 줄 수도 없다. 비정규직 차별의 철폐, 그리고 비정규직 자체의 철폐를 위해 자신의 요구로 투쟁에 나설 수 있을 때에만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자신 있게 장래희망을 말해 보라고 말해줄 수가 있다.

4. 그런데 사실 이 구호는 사용자가 설정해 놓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자들 사이에 차별 말라는 구호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의 기치이고, 노동법 조항 곳곳에 이걸 새겨 놓고 법이라고, 우리의 정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 노동운동은 산별노조야말로 이걸 쟁취해 낼 조직형태라고 선전해 왔다. 사업장, 즉 기업의 담장을 넘어 초기업단위로 노동조합 형태를 갖춰야 비정규직의 차별 철폐, 비정규직 철폐를 해 낼 수 있다고 선전했다. 비정규직까지 하나의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산별노조야말로 그럴 수 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산별노조라고 해서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고 비정규직을 철폐할 수 있다는 법은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의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기업별노조에서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산별노조라도 같은 사업장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별도의 지부·지회로 편제한 경우도 많다. 노동자의 고용형태와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니 산별노조운동이 전개되고 있어서 장래에는 산별노조가 지배적인 노동조합 조직형태가 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 오늘 이 나라에서는 내일은 당연하게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오직 이 나라 노동조합이,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 그리고 비정규직 자체의 철폐를 자신의 요구로, 투쟁으로 나설 수 있을 때에만 기대할 수 있다. 그러면 되는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면 노동운동은 되는가. 이것이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의 기치이고, 노동법 조항 곳곳에 이걸 새겨 놓고 법이라고, 우리의 정의라고 말하고 있는데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면 되는가. 이 세상에서 노동의 정의는 그렇게 해결되는 것인가.

5. “비정규직을 차별하지 마라.” “비정규직 철폐하라.” 이 구호는 일하지 않는 자가 일하는 자와의 차별을 말하지 않는다. 이 노동의 구호는 자신과 자본의 차별금지는 말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을 차별대우하지 말고,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말라는 구호다. 일하지 않는 자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차별 취급하지 않겠다는 보잘것없는 법의 정의다. 이것은 일하는 자의 정의라고 할 수가 없다. 일하지 않는 자와 자신의 차별은 말하지 않는 정의다. 어찌 보면 이것은 일하지 않는 자가 말하는 정의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런 정의가 짓밟힐 때만 분개한다. 그러니 별 수 없이 일하지 않는 자의 정의만 우리의 정의인 거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노동의 정의는 없다. ‘초딩’의 장래희망, 정규직의 꿈만 있을 뿐이다. 일하지 않는 자와 일하는 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정의는 없다. 노동과 자본을 경계 짓는 분별이 없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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