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삼성전자가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투병하는 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했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인정하는 한편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보상, 독립기관을 통한 반도체사업장 안전보건관리 현황진단과 재발방지 대책수립, 산재소송 보조참가 철회를 약속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병석에 누워있는 상황에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이번 삼성전자 발표에 대해 백혈병 피해자와 유가족,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그리고 중간에서 노력해 온 심상정 정의당 의원 모두 환영하고 나섰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백혈병이 산업재해라고 인정하지 않은 대목에서는 아쉬워하고 있다. 또한 보상과 재발방지, 법제도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삼성전자가 면피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 문제를 진짜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문제 된 삼성 백혈병, 사회적 해법 찾아 달라 

정애정
(삼성전자 백혈병 사망자 고 황민웅씨 부인)

2005년 7월 남편이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9년 만에 삼성전자의 사과 발표가 있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사과를 받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삼성전자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9년을 싸웠다. 지금은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우리의 싸움이 헛되지 않았구나, 잘 싸웠구나 생각이 든다.

삼성전자는 피해자가 있다는 것은 인정을 했지만 산재 인정 여부는 말을 아꼈다. 소송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재판에서 지더라도 삼성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는 처음에는 개인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사회적 문제가 됐다. 삼성전자라는 국내 최고의 기업에서 끔찍한 산재가 발생해 노동자들이 죽어 나갔다는 사실에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고 함께 분노해 줬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과 반올림 등 시민·사회단체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함께 싸우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나서 주기 바란다. 피해자들에게는 제도를 개선하거나 법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전문가와 국회가 우리나라 산업안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주기 바란다. 다시는 이 같은 끔찍한 재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해법을 찾아 달라.

삼성과 교섭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않았다 … 이제 첫 삽을 뜬 것 

이종란
반올림 활동가
(공인노무사)

이제 첫 삽을 뜬 셈이다. 삼성이 그동안 보여 줬던 태도 중 가장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사과와 보상 그리고 재발방지 대책을 논의한 것이다. 반도체 공정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해외 언론마저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언젠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이 사과했다고 끝이 아니다. 전환점이 된 것뿐이다. 삼성전자가 밝혔던 "제3의 중재기구를 통한 해결"은 반올림이 제안한 것이 아니다. 반올림은 지난 7년간 문제제기를 하면서 삼성과 제대로 된 교섭조차 진행해 본 적이 없다. 삼성과 반올림 그리고 유가족의 입장이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못한 상황에서 제3의 중재기구는 아직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앞으로 삼성전자와의 교섭을 통해 풀어야 하는 부분이다.

삼성은 반도체공정과 산업재해의 인과관계에 대해 선을 그었다. 하지만 반도체공정에서 일하면 반드시 백혈병에 걸리기 때문에 대책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발병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마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삼성전자 역시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서도 약속해야 한다. 재발방지 대책을 만들기 위해 반올림이 추천하는 사업장의 화학물질과 안전보건 관리 현황에 대한 종합진단을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환경·보건·안전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화학물질안전보건위원회를 설치하고, 독립적인 외부 감사 또한 매년 받아야 한다.

반올림은 삼성이 앞으로 책임감 있는 태도로 백혈병을 예방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삼성, 신뢰회복 위해 가족과 성실히 대화해야 

심상정
정의당 의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지난달 삼성전자에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제안서를 전달한 지 한 달 만에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제가 제안한 공식적 사과·합당한 보상·재발방지 대책 등이 전향적으로 수용된 점에 대해서는 환영한다. 이제 삼성전자가 피해자 및 가족들과의 신뢰를 회복하고, 피해자 가족들과 반올림과의 협상을 통해서 조속히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이 과정에서 제가 또 도와야 할 일이 있다면 성심껏 도울 것이다. 정부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2007년 삼성전자 백혈병 노동자 고 황유미씨 사망 이후 지난 7년간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에 대해 고용노동부나 근로복지공단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런 태도가 산재 노동자들이나 가족들의 불신을 초래했고, 분쟁을 더욱 오래 지속시킨 원인이 됐다.

산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후진적인 논쟁보다 노동자들이 산재로부터 보호되고, 산재를 입게 될 경우 적극적인 치료와 재활을 받을 수 있는 선진화된 산재시스템이 필요하다. 특히 노동자들이 의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희귀·난치병에 대해 엄격한 산재인정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현행 제도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전문성 쌓인 반올림과 재발방지책 협의해야 

권영국
변호사
(민변 노동위원장)

삼성전자가 백혈병 발생에 대해 사과하고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여전히 작업장에서 화학물질을 많이 쓰는 만큼 불안 요소가 남아 있다. 작업환경을 점검하고 재발방지책을 만들어야 한다. 삼성전자는 이와 관련해 제3자의 중재기구를 통해 필요한 내용을 논의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의 작업환경 측정을 제3자가 진행한 적은 여러 차례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백혈병 발생 원인을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는 삼성전자에 면죄부만 줬다.

그런데도 다시 제3자의 중재기구라는 모호한 표현을 들고 나오면 그 구성 여부에 따라 또다시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당사자들이 포함돼 있는 반올림과 협의를 통해 방안을 찾아내야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는 데 신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반올림이 재발방지책 마련에 가장 큰 의지를 보이고 있고 전문성도 축적된 상태다. 반올림, 그리고 반올림이 추천한 인사들과 협의해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삼성, 글로벌 기업답게 사회적 책임 다해야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

그동안 모든 책임을 회피해 왔던 삼성전자가 직업병의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환영한다. 늦었지만 삼성은 소송에서도 빠지겠다고 했다. 삼성이 피해자에 대한 보상뿐만 아니라 재발방지도 약속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물론 제3자 중재기구를 제안한 것은 반올림의 의견이 아닌데도 삼성전자가 반올림이 중재기구를 제안한 것처럼 발표한 점은 아쉽다.

삼성전자의 이번 발표는 교섭주체로서 반올림의 자격 문제를 걸고 넘어져 중단됐던 교섭을 다시 열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쌍방의 대화가 시작됐으니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7년 전 아무도 삼성전자가 사과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재벌을 상대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 꾸준히 외치고 끝까지 요구한 결과다. 세상에 안전한 산업은 없다. 깨끗하다는 전자산업도 마찬가지다. 삼성의 백혈병 문제는 국민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글로벌 브랜드답게 삼성은 생산과 판매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도 다해야 한다.

보상과 재발방지의 폭도 넓게 봐야 한다. 현재 산재를 신청한 직업병 피해자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피해자를 위한 폭넓은 보상정책이 필요하다. 독립적 기관으로부터 삼성전자의 화학물질과 안전보건 관리현황에 대한 종합진단을 실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지역주민에게 화학물질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30년 이상 자료를 보존해 먼 훗날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해도 지금 제대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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