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1981년. 참 좋은 시절이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그만큼 풍요로웠다. 일자리는 넘쳤다. 인심이 후했던 시절 사람들은 국내에서 생산한 자동차 ‘포니’를 샀다. 자가용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10명 중 3명이 대학에 가던 시기였다.

정치는 요동쳤지만, 세상은 고요했다. 대학 캠퍼스 또한 그랬다. 캠퍼스 어느 곳에서나 조용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신인가수였던 이문세는 <나는 행복한 사람>을 불렀다. 춘천에서 막 상경한 김양희(52·사진)씨에게도 캠퍼스는 ‘행복한 공간’이었다.

김씨는 도화지 같은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암살되던 날, 김씨는 북한군이 쳐들어올까 봐 펑펑 울 정도였다. 그랬던 김씨에게 5·18의 처참한 현실을 담은 사진을 본 것이 변곡점이 됐다. 83년 캠퍼스를 떠나 가발공장에 위장 취업한 이후 현재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90년 피혁 제품을 만드는 가람상사를 설립해 대표가 됐지만, 생산·영업·판매까지 1인 다역을 도맡아 한다. 직함은 대표지만, 그는 노동자다.

캠퍼스 떠나 공장노동자 “후회 없어요”

가람상사의 공장문을 열자 미싱 소리가 요란했다. 가죽냄새가 훅 끼쳤다. 그는 어지럽게 널린 벨트 사이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일하고 있었다. 밤낮 없이 벨트·지갑 생산한다. 92년 설립된 가람상사는 여전히 가내수공업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명 가량의 직원이 일했다. 중국산 저가 상품에 밀려 가격경쟁력을 잃은 현재 직원은 김 대표와 73세의 이모, 남동생 김씨(50)가 전부다. 가내수공업 형태로 근근이 기업을 이어 가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4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위치한 가람상사 공장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 80년대 대학과 공장은 어떻게 달랐나.

“83년 가리봉동에 있는 가발공장의 시다로 들어갔다.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16시간을 일했다. 주말에 외출증을 끊어서 이화여대 앞에 있는 자취방에 왔는데 공기가 달랐다. 냄새나는 공장에서 지내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캠퍼스에 오면 분위기가 많이 대비됐다. 당시 여공들이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와도 좋으니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얼마나 가고 싶었겠나. 내가 대학생이 된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공장 생활이 힘들지 않았나.

“당시 일당이 1천600원이었다. 사무직 직원 월급이 16만원이었다. 영세 소규모 공장은 월급이 밀리기 일쑤였다. 야근·철야를 밥 먹듯이 했지만, 공장 일이 재밌었다. 공장일이 체질에 맞거나 팔자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가 강원도 양양에 있는 탄광에서 오래 일했다. 아버지를 통해 노동자의 삶을 보며 자랐고, 동기들보다 노동자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 집안의 반대가 심했을 것 같다.

“출판사에 취업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공장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한 뒤 위장취업 사실이 들통 났다. 기사에 '강원도 양양 출신 이대 K모양'이라고 나갔는데, 가족이 우연히 기사를 봤다.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실 정도로 충격을 받으셨다. 무릎 꿇고 가족들에게 빌었다.”
 

▲ 김양희 가람상사 대표가 서울 신월동 공장에서 가죽벨트 완제품을 검사하고 있다. 이모와 남동생이 함께 일한다. 정기훈 기자


경영·생산·영업까지 직접 뛰는 ‘학출 노동자’

그는 공장에서 사명감을 갖고 일했고, 보람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시골에서 자식 대학공부 시키는 것이 보통 힘든 게 아니다. 맏이로서 가족들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우리 사회를 개선시키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 노동운동을 택한 것에 후회는 없나.

“역사교육을 전공했다.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임용고시를 봐서 선생님이 됐을 것 같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운동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업이 좀 더 성공했더라면, 공익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을 텐데 안타깝다.”

- 봉제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사장이 됐다. 경제적으로 나아졌나.

“20년 가까이 대표로 있었지만, 큰돈을 만지지 못했다. 빚만 계속 쌓였다. 사업을 시작했을 때 고정거래처도 있었다. 96년까지는 매출도 거래처도 꾸준히 늘었다. IMF 직전에 부도를 맞았다. 우리가 자체 브랜드 없이 의류회사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주로 받다 보니 내수 침체와 함께 매출이 10분의 1로 줄었다.”

- 지금은 어떻게 유지하고 있나.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시장과의 거래도 끊겼다. 중국과 가격경쟁이 안 되니 지금은 국내거래처 일부만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사은품·기념품 생산으로 사업전략을 바꿨다.”

“영세 제조업체 사정 어려워 … 지원정책 절실”

- 사업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


“노조 설립에 참여하다 해고됐다. 당시 고정거래처도 있었고, 생산·영업·사무직을 두루 거쳤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남들 못지않게 기업을 키워보겠다고 다짐했다.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우받는 그런 기업으로 키우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어 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 사장이 돼 보니 뭐가 다른가.

“매출이 감소하면서, 자재비·유지비·인건비를 빼면 내 몫으로 들어오는 돈은 없다. 밤낮 없이 일하고, 직원들에게 최저임금도 못 준다. (나 같은 영세 사업자도) 노동법 사각지대다. 마음은 더 주고 싶지만, 매출은 계속 줄어 여건이 안 된다. 내 식구들 데려다 고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 영세 제조업체를 운영하면서 어려움이 있다면.

“가람상사 같은 작은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항상 돈에 쪼들린다. 우리는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매출 규모와 담보에 따라 중소기업 지원 규모가 다르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제도가 있어도 우리 같은 영세기업에게는 문턱이 높다. 해외시장에 팔 수 있도록 정부에서 홍보와 영업을 지원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산인력이 모자라 영업까지 뛰기에는 여력이 없다.”

기념품 사업 전환 뒤 도움 손길 이어져

- 가람상사 제품 자랑을 해 달라.


“우리 제품은 20년 경력의 장인들이 만들고 있다. 국내 유명 의류회사의 OEM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높은 품질과 기술력이 있다. 제품 하나하나 일일이 검사를 한 다음 판매한다. 품질관리가 엄격하다.”

- 바람이 있다면.

“지난해부터 기념품·선물용품 생산을 하고 있다. 올해는 여기에 주력해 매출을 좀 높이고 싶다. 언론에 제 이야기가 나간 이후 기념품 제작을 문의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제가 잘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지인들도 이번 계기로 도움을 주고 있다. 마음씨가 따뜻한 분들이 많다. 기념품 제작 사업이 잘 돼서 직원들 일한 만큼 월급도 주고, 어렵게 활동하는 단체들에 기부도 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소박한 바람도 전했다.

“어머니가 5개월째 투병 중이다. 음식을 못 드셔서 영양주사를 맞으신다. 어머니가 빨리 회복하셔서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

글=구태우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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