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그 심각성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진보진영 안에서 보자면 그렇다. 다름 아닌 ‘저출산 고령화’ 문제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1960년 52.6세에서 2010년 79.4세로 크게 늘어났다.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면 평균수명이 60세가 채 안 됐던 것이다. 정년은퇴 후에 노년으로 보낼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설령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조용히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주는 밥을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 부양자 입장에서도 크게 부담이 안 됐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지금의 중장년들은 100세까지도 거뜬히 살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수십 년 전 잣대로 노년 문제에 접근한다고 가정해 보자. 수가 줄고 있는 젊은 현역들이 날로 늘어 가는 노년층을 부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사정이 곤란하기는 당사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40여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주는 밥 받아먹으며 죽는 날만 기다린다는 것은 끔찍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래저래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생 2막’이다. 정년을 은퇴가 아닌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미 인생 2막을 위한 다양한 도전과 실험이 이뤄지고 있고 이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다방면에서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인생 2막 입장에서 보자면 정년연장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2막을 준비해야 하는데 60세가 넘으면 늦은 감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 2막은 노년층을 부양 대상으로 보는 전통적 시각으로부터의 과감한 탈출이다. 노년층 역시 다양한 역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그 대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이다. 노인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해 생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원주의 ‘노인생협’은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이 과정에서 젊은 세대와 상생모델을 만들 수 있는 여지도 매우 많다. 예를 들면 대전 유성구에서는 영유아 복지시설과 경로당을 나란히 짓고 노인들이 영유아와 함께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양측 모두에서 매우 만족스런 반응이 나타났다. 가족 단위로 이뤄져 왔던 노인들의 영유아 돌봄노동을 공공 성격의 사회복지로 전환한 케이스다.

중요한 것은 인생 2막을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노조에서 ‘퇴직자협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퇴직자협동조합을 결성한 뒤 농촌 지역에 100가구 정도의 복지마을을 만들어 함께 사는 것을 모색하고 있다. 정년퇴임 후에는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조건에서 이 같은 모색은 매우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잘만 준비하면 복지마을은 해당 지역사회에서 진보적 흐름을 확산시키는 아지트가 될 수 있다. 이는 곧 민주노조에서의 퇴직이 역량의 퇴장이 아닌 새로운 역량을 사회에 공급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 학생운동이 사회운동에 역량을 공급하는 저수지 역할을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노동운동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같은 역할이 현실화한다면 능히 진보운동의 새로운 이정표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사고를 조금만 바꾸면 정년퇴임 이후에 훨씬 대안적이고 진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말 그대로 젊고 혈기왕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진보에게 절실한 것은 ‘젊은 노년’을 상상하는 것이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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