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심 공인노무사
(법무법인 함께)

지인 중에 노조나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활동가들의 노동권이란 무엇일까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단체에서 활동하는 상근자들은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다른 이를 위해 활동하지만 정작 본인의 권리는 아무도 챙겨 주지 않는다.

수년 전 필자가 몸담았던 진보정당에 상근자노조가 처음 생겼을 때 설왕설래했던 기억이 난다. 필자 역시 활동가들은 모두 결의로 똘똘 뭉쳐 개인의 안위 따위는 접어 두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물론 활동가가 운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개인의 삶보다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해 더 큰 욕심을 가지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 서울 땅에서 주거빈곤층·에너지빈곤층·문화생활빈곤층으로, 기본적인 생활까지 결핍돼 살아가는 것이 ‘진보’ 집단 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치부돼 버린다면 그건 참으로 모순 아닌가. 이것은 수년 전의 일이지만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진보란 무엇일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낮은 곳에서의 억압과 모순을 없애기 위해, 그것 이외에 다른 가치는 모두 뒤로 미뤄져야 하는 것일까. 깊은 고민이 밀려온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그것을 담보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해 주고, 인간적인 대우를 한 후에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활동가는 당연히 참고 이해해야지, 하는 태도가 상실감을 갖게 한다.

활동가 남편 중에는 자신의 대의가 중요하다 보니 육아며 가사, 가족을 향한 관심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밖에서는 존경받을지 몰라도 집에 와서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기만 한다면 결코 존경하기 힘들다.

문예공연을 섭외하면서 주최측의 정당성과 어려움을 강변하며 공연을 ‘재능기부’해 달라 요구하는 일도 참 많다. 문예활동가들이 잠시 노래나 공연만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삶이 있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비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상담을 하다 보면, 과거에 학생운동 내지 노동운동 부문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사람이 만든 회사와 관련한 상담이 꽤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 회사 중에 근로조건 내지 직원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곳이 많다. 말이 안 통하거나 철저히 ‘사용자스러운’ 경우가 어찌나 많은지.

대학 시절에 자신의 활동자금을 위해 후배에게 돈을 빌린 한 선배가 "돈을 갚아 줬으면 좋겠다"는 후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 돈이 어디 쓰이는 돈인지 몰라서 그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위대함과 정당성에 심취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근본 인식은 모두 같다. 내가 옳으니 당신이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억압이다.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일상에서 노동권을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서비스 노동자들의 달콤한 서비스에 익숙해져 조금이라도 불친절하다 싶으면 ‘갑질’을 하려는 못된 본능이 불쑥 찾아온다.

부디, 기억하고 싶다. 나의 정당함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려면 같이 갈 사람의 권리 역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진보가 세상을 경영하게 됐을 때 과연 어떤 세상이 돼야 하는 것인지 그려 본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