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수 변호사
(민주노총 법률원장)

2013년 10월24일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가 예고된 10월24일 새벽 법원에 제출할 자료를 정리하다 1989년 문교부가 일선 교육청에 내렸다는 ‘문제 교사 식별법’(전교조 설립 이후에는 ‘전교조 교사 식별법’으로 바뀜)을 보고 키보드를 멈췄습니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문교부가 파면·해임 대상자로 솎아 낸 문제 교사, 전교조 교사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1990년 고3 때 파면된 국사 선생님도 그랬습니다. 예민한 사춘기, 기죽었던 저 같은 아이들을 보듬어 주셨던 선생님,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던 선생님, 그들이 전교조 조합원이었습니다. 바빠 죽겠지만 먹먹한 마음에 잠시 키보드를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벽 6시쯤 우리 사무실을 치워 주시는 아주머니가 오셨습니다. 엄청 바쁜 티를 팍팍 내면서 인상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제 자리는 감히 치우실 엄두를 못 내시고 나가셨습니다. 소장과 신청서를 마무리하고 제 자리를 보니 쓰레기더미가 돼 있었습니다. 이런, 저희가 일할 수 있었던 건 매일같이 자리를 치워 주시던, 엄청 인상 쓰는 저 몰래 쓰레기통을 비워 주신 환경미화원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2013년 10월25일

2012년 MBC 파업으로 해고된 당사자, 지금은 뉴스타파 진행자인 최승호 PD님 본인신문이 있었습니다. 아이템 검열과 감시로 고통 받던 PD수첩 PD들의 수난, 2010년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편 방송을 막으려던 경영진의 간섭을 극복하고 방송한 경위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MBC에서는 '4대강의 4'자도 꺼내기 어렵게 됐고, 진실을 알리려던 PD와 기자들은 핀잔을 먹고 용인 드라마세트장, 경인 광고지사로 쫓겨났습니다. "만약 MBC가 후속보도를 통해 제대로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국민들에게 알렸더라면 금강과 낙동강 녹조도, 물고기 떼죽음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냐"는 안타까운 말씀, "87년 민주화를 거치면서 MBC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는데 공영방송 MBC 구성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근로조건은 공정방송"이라고 단호히 말씀하실 때 잠시 또 먹먹해졌습니다. 요즘 MBC를 보기 힘들지만 MBC 구성원들을 존경하는 이유를 새삼 떠올리게 됐습니다.

2013년 12월22일

이른 아침부터 수천 명의 경찰이 민주노총이 있는 경향신문사 건물을 둘러싸기 시작했습니다. 헬멧과 방패로 무장한 6천여명의 경찰 수레바퀴에 맞선 수백 명의 노동자,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밤새 경찰이 민주노총을 침탈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분들이었습니다. 6천여명대 수 백명, 방패·최루액대 맨몸. 중과부적, 역부족이었습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처럼 자기의 힘은 헤아리지 않고 달려오는 수레바퀴를 자신의 팔뚝으로 막겠다고 나선 사마귀들이었습니다. 해머로 깨진 유리창 파편과 최루액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고 사마귀들은 하나둘씩 끌려 나왔습니다. 그렇게 사마귀들이 팔뚝을 휘둘러 수레를 막은 지 12시간, 14층 건물에서 더러운 깃발 하나가 펄럭였습니다. 좌우를 막론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동네북 민주노총 깃발이었습니다. 빌어먹을, 사마귀가 수레를 막을 수 있었구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2013년 12월31일

어디 정동 경향신문사뿐이겠습니까. 저 멀리 제주 강정, 경남 밀양, 진주, 그리고 서울 대한문, 환구단, 서울역 KTX, 충정로 골든브릿지빌딩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수많은 사마귀들이 수레바퀴를 막겠다고 나선 한 해였습니다.

촌지를 받지 않고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고 상담하려 했던 교사,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고 시비를 걸던 기자와 PD들, 민영화를 막겠다고 나선 철도 노동자들도 시류를 거스르는 사마귀였고 법외노조 통보·징계라는 수레바퀴에 깔렸거나 깔릴 예정입니다. 그러나 팔뚝이 꺾인 사마귀, 수레바퀴에 깔린 수많은 사마귀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우리 모두가 수레바퀴에 밀려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사마귀가 모이면, 더 힘차게 팔뚝을 휘두르면 어쩌면 수레바퀴가 멈출지도 모른다는, 아니 방향을 틀어 제대로 굴러갈 수도 있다는 희망도 갖게 됐습니다. 문틈 사이로나마 겨우 보이는 희망, 이것은 팔뚝이 꺾인 사마귀 여러분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