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2008년 금융위기의 뿌연 먼지가 여전히 미국 하늘을 가리고 있을 무렵 대서양 건너 유럽 대륙에서 유로존 위기가 터졌다.

유로존 위기의 발화점은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등 남유럽 나라들이었다. 남유럽 나라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위기에 직면하면서 유로존을 괴롭혔던 것이다. 남유럽의 경제위기를 두고 해석이 구구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주로 기초 체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의 복지 포퓰리즘이 위기를 낳은 주된 요인이라고 공격했다. 어느 정도 그런 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위기에 직면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유럽 17개국이 ‘유로’라는 단일 화폐를 사용하는 유로존을 출범시켰을 때만 해도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경제의 숨통을 조여 왔던 과잉자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경제력이 앞선 나라의 과잉자본이 상대적으로 저발전 상태에 있는 나라들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가서 경제성장을 자극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그러면서 역내 무역이 함께 증가해 전체적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과거 각국이 독자적인 통화를 보유하고 있던 무렵에는 외환 이동이 쉽지 않았다. 경상수지 흑자 폭이 크지 않은 나라는 외환보유가 부족한 탓에 외국 금융자본이 자유롭게 진입할 수가 없었다. 자칫 교환이 어려워지면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로존이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줬다. 독일이나 그리스가 같은 화폐를 사용하기 때문에 독일의 금융자본이 그리스로 이동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외환 리스크 발생의 여지를 없애 버린 것이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독일과 프랑스처럼 유럽 내에서도 경제력이 앞선 나라들은 과잉자본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누적돼 있는 상태였다. 반면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등 남유럽은 상대적으로 저발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금융자본이 파고들 여지가 많았다. 더욱이 이들은 공통적으로 천혜의 관광자원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부동산 개발의 잠재력이 매우 풍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일과 프랑스 등에 과잉 축적돼 있던 금융자본이 대거 남유럽으로 몰려갔다. 돈뭉치가 밀려오자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아 부동산 개발에 열을 올렸다. 경치 좋은 해안마다 각종 휴양시설이 들어섰다. 부동산 개발 붐이 일자 경제 전체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나라로 손꼽혔는데 바로 부동산 개발 붐에 힘입은 것이었다.

남유럽 나라들이 부동산 개발 붐으로 경제 호황을 누리자 유로존 내 무역이 크게 증가했다. 그로 인해 가장 큰 덕을 본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이 유로존 출범과 유지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가 여기서 발견된다. 이 순간까지는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유로존은 매우 성공적인 선택인 듯이 보였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부동산 개발 붐이 일면 반드시 투기적 가수요가 붙는다. 그러면서 가격도 함께 뛰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거품이 잔뜩 끼게 된다. 문제는 거품은 때가 되면 반드시 깨진다는 데 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남유럽 나라들 사이에 형성됐던 부동산 거품이 잇달아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품이 꺼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과잉 공급된 매물들이 곳곳에서 팔리지 않은 채 흉물처럼 방치됐다. 대부분 빚을 내어 지은 것들이었다. 도리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빚을 갚지 못해 파산했다. 대출금 상환이 차질을 빚자 금융기관들도 덩달아 나자빠졌다. 뒷수습하는 데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 정부도 재정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경제 전반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미국처럼 거품 위를 항해하다 대형 사고에 직면한 것이다.

남유럽 상태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리스에는 채소 상인이 장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면 시민들이 나타나 남은 쓰레기를 줍는다. 자신들이 먹기 위해서다. 이탈리아에서는 수해로 부락이 황폐화됐는데 지방정부가 예산이 부족해 몇 달째 방치한 사례도 있었다. 과거 포르투갈에서는 식민지였던 브라질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민 온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거꾸로 일자리를 구해 브라질로 떠나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유로존은 독일 정부를 중심으로 남유럽 경제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수천억 유로를 쏟아부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등은 재정긴축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겪었다. 장밋빛 꿈을 안고 출범했던 유로존이 만신창이가 됐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