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

금속노조가 9월부터 중앙·지역·지부·지회를 망라하는 선거에 들어간다. 이 중 80% 이상의 조직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완성차지부 선거의 특징은 87세대의 재등장이다. 언론에서 말하듯 전직 위원장과 지부장들의 총출동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눈여겨볼 만하다.

선거의 계절, 재등장하는 87세대

그들이 왜 지금 전면에 다시 나섰을까. 아마 회한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소위 민주노조운동세대로서 무기력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을 바라보며, 정치·사회적으로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는 현 상황을 목격하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필자도 위기를 넘어 암흑 같은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민주노조운동을 보며 '이게 아니었는데,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민주노조운동은 이게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비전도 없이 오로지 권력에만 집착하는 노동조합 선거라는 진흙탕 싸움에 뛰어드는 이유는 아마 ‘이대로는 안 된다.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노동해방 붉은 꿈'은 일장춘몽으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전면에 등장한 현장 출신 노동자들은 실로 많은 일을 해냈다. 97년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기 전 불과 10년 동안 400%의 임금인상을 쟁취했고, 노동소득분배율을 52%에서 60%까지, 국민소득 3천달러인 나라를 1만1천500달러까지 올려 대한민국 내수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주역들이다. 6월 민주화항쟁의 성과를 이어 세상의 주인으로 노동해방이라는 뜨거운 열망으로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노동정치를 꿈꾸며 민주노동당까지 창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한낱 꿈같은 아득한 이야기이고 무용담일 뿐 모든 게 실패로 나타나고 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지난 26년 동안 자본과 투쟁을 하며 그들과 많이 닮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왕정과 같은 대통령중심제, 재벌회장 중심의 1인지배체제에 익숙해져 가며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망각했다.

민주노조의 주인은 조합원이라는 말은 허울에 불과하다. 승자독식 선거체제는 현장 깊숙이 '현장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정파가 개입할 여지를 만들었다. 조합원 대중은 안중에도 없이 단위노동조합을 장악하면 마치 그 조합원들까지 장악하고 그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고 믿는 정파들은 또 다른 지배자이자 괴물이 돼 버렸다. 자신들이 당선되면 세상의 모든 걸 해결해 줄 것 같은 소영웅주의는 노동조합을 해결사 혹은 자판기로 전락시켰다.

노동조합 권력의 본래 주인이었던 조합원들은 집행부만 바라보며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노조노예'로 길들여졌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나라, 노동기본권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나라에서 산별 조직형태 전환 이후 산별교섭과 투쟁을 쟁취하겠다는 검증되지 않은 추진전략은 자본과 정권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또한 돈 대고 표 대는 대리정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의회주의는 대중정치투쟁을 내려놓고 야권연대로까지 막나간다.

결국 노동정치와 계급정치는 실종되고 말았다. 97년 외환위기 사태와 함께 전면에 등장한 신자유주를 넘어설 대안사회의 상을 세우지 못한 탓이다. 정권과 자본의 분할지배 통치전략에서 나온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노동운동, 진보정치에 국민들이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회적 고립이 현재 우리들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전후세대로 본격적인 세대교체

어느 노동정치 토론회장에서 30대 후배가 전쟁세대와 전후세대라는 표현을 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의 선배들이 전쟁처럼 벌여 온 정파의 유산을 후배들인 전후세대까지 떠넘기지 말라는 피를 토하는 호소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역사는 지금의 위기는 스스로 자처한 것이며, 대중과 괴리된 헤게모니 쟁탈전에 치중하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이 망했다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87세대가 선거에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향해, 진보정치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고자 하는 마지막 몸부림일 수 있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이뤄야 할 최고의 목표는 민주노조 재건이다. 권력을 잡으러 가는 게 아니라 권력의 본래 주인인 조합원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 1인지배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혁신한 다음 민주적 분배로 권력투쟁을 중단하고 단결투쟁의 원리대로 복원하는 일이다. 진보정치 또한 하방을 통해 지역당을 건설하고 현장과 지역 대중의 신망을 회복한 뒤 '10년 후 중앙당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게 더 빠를 수 있다.

87세대는 이번 선거를 끝으로 나쁜 유산을 청산하고 전후세대에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을 물려줘야 한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밀려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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