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말 한마디로 진보정당의 생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 이른바 '용광로론'으로 재야 진보세력을 한 울타리에 규합시켰던 노년의 운동가가 다시 현실운동으로 돌아온다.

5일 오전 서울 광화문 인근 개인사무실에서 만난 권영길(72·사진)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오래된 생각을 이제 실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나살림)'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든 그는 10일 오후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법인 출범식과 후원의 밤을 개최한다. 권 전 대표는 지난해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 후보로 나선 이후 최근까지 대외활동을 자제해 왔다.

나살림은 '평등·평화·통일운동'을 펼치는 것을 설립목표로 한다. 권영길 나살림 이사장은 "정치활동 재개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18대 국회의원을 마지막으로 정치일선은 떠났고, 경남도지사 선거에 나선 것은 정권교체를 위한 '복무' 차원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앞으로도 정치활동을 재개할 생각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살림의 활동 목표는 무엇일까. 권 이사장은 "교육비·병원비 걱정 없는 나라 만들기를 주제로 무상교육·무상의료의 필요성을 시민들에게 알려 나가겠다"며 "무상교육·무상의료가 진보정당 강화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복지국가의 토대도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파트 골목·시장·지하철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그의 활동 무대가 된다. 혼자서 밑바닥을 박박 기겠다는 뜻이다. 활동 시한은 10년으로 내다봤다. 권 이사장은 "이대로 두면 10년이 지나도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은 바라볼 수 없다"고 단언한 뒤 "지금부터 10년은 노력해야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고 밝혔다.

"그래서 제가 요즘에는 10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속으로 빌고 있습니다. 그 이상 산다면 이후 여생은 조금 쉬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인터뷰 말미에 권 이사장이 건넨 말이다.

- 경남도지사 보궐선거 이후 오랜만에 활동을 시작하는데.

"올해 초부터 창원대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다. 1학기는 현대사회학 특강을 했고, 2학기부터는 문화와 사회라는 교양과목을 맡게 됐다. 수강생이 100명이 넘는다. 조금 힘든 2학기가 될 것 같다."

-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다.

"학점을 잘 주지는 않는다.(웃음) 사실 1학기 때 고생을 좀 했다. 학점을 주는 데 학교 방침이 상대평가였다. 반대하려고 했는데 학교 전산시스템이 그렇게 짜여 있었다. 내가 상대평가를 하지 않으면 다른 교수들의 학점도 입력이 안 되게 돼 있다. 고민이 많았다. 수강생이 많아진 만큼 학점 관리가 더 어려울 것 같다."

- 평등·평화·통일운동을 하겠다고 했는데 정치를 재개하는 것인가.

"2011년 진보대통합을 호소하면서 단일정당이 탄생한다면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순간 나의 정치활동은 끝난 것이다. 지난해 경남도지사 보궐선거도 정치활동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대선과 함께 선거가 치러졌기 때문에 출마했다. 경남에서의 득표가 정권교체의 성사를 가른다고 봤다. 홍준표 찍는 사람이 박근혜를 찍고, 권영길 찍는 사람이 문재인을 찍게 만드는 것이 과제였다. 당선이 어렵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개인 이미지 손상을 각오하고 출마했다. 정권교체라는 대의에 복무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정치를 재개할 생각은 없다."

- 나살림을 만든 목적은.

"무상교육과 무상보육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을 전환시키고 싶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복지를 실행할 수준이 아니라는 기득권의 선전에 국민들은 세뇌돼 있다. 이것을 깨트리지 않고서는 보편적 복지국가로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당이나 국회의원의 활동으로는 어렵다. 새로운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기회의 균등이 이뤄진 다음에야 평등사회 건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진보정당 강화의 토대뿐 아니라 복지국가의 토대를 닦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범국민적 계몽운동을 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활동이다.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지하철 안에도 들어갈 것이다.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비생산적이고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다. 6개월 혹은 1년이 지난 뒤 활동의 진정성이 확인된다면 이 운동에 같이하려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이고 주목도 받게 될 것이다. 10년 정도 뛰어야 되는 일이라고 본다. 이대로 두면 10년이 지나도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을 꿈꿀 수 없다. 지금부터 10년은 노력해야 한다."

- 평등·평화·통일은 옛 민주노동당의 수레바퀴였다. 돌고 돌아온 느낌이다.

"복지가 성장동력이다. 평화체제와 평화는 밥이다. 나아가 사실상 통일상태에서 이뤄지는 남북경제공동체가 우리의 살 길이다. 이런 프로세스로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향후 1~2년 정도는 교육비와 병원비 걱정 없는 사회에 집중할 것이다. 민생 문제를 주축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려야 다음 운동에 대한 거부감도 덜할 것이다.

누군가는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말고 이 주제를 끊임없이 가지고 가야 한다. 정치조직은 터지는 사안들 뒤처리하다 제 할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람 사는 가장 기본적 요소가 갖춰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이런 토대를 만들어야 운동도 발전할 수 있다."

- 역사 발전의 단계를 만드는 운동이라는 의미인가.

"무상교육은 사회 양극화를 푸는 열쇠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곧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는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사회가 돼야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학벌 없는 사회가 되려면 대학서열화를 폐지해야 한다. 국가 재정으로 대학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말했던 국·공립대 통폐합과 저녁이 있는 삶도 무상교육 정신에서 출발해야 달성할 수 있다. 무상교육 정도의 기초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 곧바로 활동을 시작하는 것인가.

"올해는 거리연설과 토론회를 전개할 것이다. 서명운동도 단계적 목표를 세워 진행한다. 1천만명 서명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움직일 계획이다. 그만큼 많이 뛰겠다. 전국 곳곳을 누빌 생각이다.

사실 성과물을 손에 쥐고 시작하는 운동이다. 18대 국회에서 고등교육법에 무상교육의 개념을 삽입하는 데 앞장섰다. 정부가 고등교육 재정 10개년 계획을 세워서 2년마다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국가가 공립·사립을 막론하고 고등교육을 책임져야 한다. 교육비 걱정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호소가 허황되지 않다는 것이다. 법대로 하자고 요구할 것이다."

- 정치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다. 지금의 진보정당을 어떻게 보나.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고, 그렇게 듣고 살아왔다. 지난 1학기 현대사회학 특강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유신정권부터 최근까지 총정리를 했다. 한 사건, 한 단락을 보면 우리가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87년 항쟁에서 승리했다고 하지만 바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동아일보에서 언론자유운동을 하던 분들은 지금도 같은 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한 대목만 보면 이긴 게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지난 60년을 돌아보면 한국 사회는 그래도 비교할 수 없이 민주화가 진척됐고, 한국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진보정당도 탄생했다. 진보정치가 버림받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조차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토막으로 보지 말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어진다."

- 단시간에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을 또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긴 호흡으로 보자는 거다.(웃음) 제가 요즘에는 10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속으로 빌고 있다. 그 이상 산다면 이후 여생은 조금 쉬어도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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