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
(변호사)

지난 1일은 헌법재판소가 만들어진 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워낙 큰 뉴스가 많아서인지 언론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지 못한 듯하다. 4일 ‘헌법재판소와 하는 아름다운 하루’라는 행사를 서울 안국동 아름다운가게에서 했다는 기사만 눈에 띈다. 웃고 있는 헌법재판소장의 얼굴에 쓸쓸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기본권 보장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헌법재판소에 대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나름의 소감이다.

모두들 아는 것처럼 헌법재판소는 87년 민주화투쟁의 산물이다. 법률과 대통령을 포함한 위헌적 공권력 행사에 대한 통제가 필요했다. 위헌적인 법률과 무소불위 권력이 횡행하는 공포시대·권위시대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었다. 물론 이런 거창한 목표가 그대로 실현되리라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헌법재판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할 뿐만 아니라 자유로이 기본권 보장을 주장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에서 다수 시민들의 염원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권위주의 정부가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가 만든 제도 중 최고의 히트상품이다. 우리의 헌법재판소를 배우려는 민주주의 후발국들이 적지 않다는 뉴스가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주요 결정을 하는 날이면 시민들의 눈과 귀가 자연스레 헌법재판소로 향한다.

이 같은 헌법재판소의 위상은 아마도 시민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원래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리라. 검사의 불기소처분 정도만을 다루던 형식적 기관에서 위법한 국가권력으로부터 인권과 기본권을 지켜 내는 정치적 사법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다수 조문은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군가산점 제도는 양성평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모두 위헌결정을 받았다. 일재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며 친일재산환수법에 대해 합헌결정을 한 것은 25년 역사상 베스트 결정으로 뽑히기도 했다.

노조와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보호하는 결정도 적지 않았다. 노동권은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천부인권이라는 선언은 그 시작이었다. ‘자유권적 성격을 띤 사회권’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근로의 권리와 구분조차 하지 못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꽤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다른 단체와는 달리 노조는 정치활동의 자유가 있고 이에 따라 정치자금까지 자유로이 기부할 수 있다는 결정은 90년대 중반 활로를 찾아 헤매던 노조운동이 오늘과 같은 정치운동으로 발전하는 기초를 제공했다. 최근에는 노조의 정당한 쟁의행위를 무조건 업무방해로 단죄할 수 없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그러나 요즘 헌법재판소의 모습에 실망하는 이들이 많다. 적지 않은 결정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갈리거나 일부 기본권에 관한 결정은 과거에 비해 오히려 퇴보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자와 노조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찾기 어렵다.

지난 정부는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금융·공공기관 노사관계에 개입했다. 하루아침에 단체협약이 무시됐고 조합원 편 가르기에 앞장섰다. 위헌적 공권력 행사가 분명했음에도 헌법재판소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눈감았다.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에 대한 결정은 과연 그동안 봐 왔던 헌법재판소 결정문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무성의 그 자체다.

헌법재판소는 새로운 기운과 역할이 필요하다. 지난달 헌법재판소는 국회에 스스로 연구한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법원의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핵심이다. 헌법재판소 위상과 권한을 더욱 높여 달라는 요지다.

그런데 이 요구에는 핵심이 빠져 있다. 헌법재판소 본래 존재 이유인 시민 기본권 보장 방법에 관해서는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판관의 구성을 다양화하고 가능하면 재판관수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노동운동가 출신 재판관의 결정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또한 서면심리 중심이 아니라 공개변론을 포함해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심리방식을 채택할 필요도 있다. 미래의 25년을 위한 꼼꼼한 준비를 기대한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94kimh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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