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국가정보원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실과 전·현직 당직자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국가보안법 적용 체포를 전격 단행했다. 여러 신문이 29일자에 이 사실을 요란하게 보도했다.

오랜 독재정권을 경험한 이 나라에서 국가보안법과 언론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하다. 58년 자유당은 2년 앞으로 다가온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반된 민심으로 보아 정상적 선거로는 도저히 집권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강압적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오제도·조인구·문인구 등 검찰 실무자들이 마련한 보안법 개정안은 “공산분자를 더 잡을 수 있는 이점보다는 언론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인의 생활을 위협할 심대한”(당시 민주당의 반대성명) 반민주적인 내용이었다.

58년 보안법 파동 때 야당 의원들은 국가보안법 개악에 반대하며 국회에서 농성했다. 6일째 되던 날인 58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난입한 무술경위들에게 마구잡이로 끌려가며 울부짖었다.

58년 12월24일은 한국 의정사에 길이 남을 치욕의 날이었다. 소위 ‘24파동’이라 불리는 ‘보안법 파동’의 날이다. <사상계>는 너무도 허기지고 말할 기운이 떨어져 59년 2월호 권두언(머리말)을 <무엇을 말하랴-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만 붙인 채 백지로 발행했다.

보안법 파동과 경향신문 폐간 직후 목사이자 철학박사인 공보처장은 이아무개 서울대 조교수가 쓴 <국부 이승만 박사가 계시한 민주주의 이념>이란 50장 가량의 원고를 공보처 출판과장을 시켜 <사상계>에 내달라고 들고 왔다. 그 공보처장은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광무신문지법’까지 원용해 당시 유력 일간지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관록을 지닌 분이었다. <사상계> 발행인 고 장준하 선생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구차히 목숨을 부지해 나가느니 차라리 죽자는 비장한 생각으로 거부했다”고 밝혔다.

보안법 개악 뒤 경향신문은 59년 1월15일자 24파동의 ‘10용사’를 소개했다. 김상도·최규옥·박만원·임철호·장경근·박세경·한희석·김의준 자유당 의원, 홍진기 법무부장관, 최정우 국회 사무총장이 그들이다.

자유당 정권은 눈엣가시 같았던 경향신문을 폐간하기 위한 빌미를 잡기에 혈안이었다.

경향신문 59년 2월5일자 고정칼럼 <여적>엔 시인이기도 한 주요한 논설위원이 히멘스 교수의 글을 인용해 <다수의 폭정>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주요한은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중략) 부정행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재빨리 다수당을 소수당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당 정권은 바로 이 대목을 문제 삼았다. 헌법에 규정된 선거제도를 부정함과 동시에 폭동할 것을 선전함으로써 군정 법령 88호를 어겼다는 거다.

<여적>에 글이 나가자 집권당의 2인자 이기붕은 즉각 홍진기 법무부장관에게 읽어 봤느냐고 묻는 등 상당히 당황했다. 검찰은 59년 2월28일 글을 쓴 논설위원 주요한과 발행인 한창우 사장을 구속했다. 위기를 감지한 경향신문은 3월5일자로 정부에 발행인 교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는 3월16일 “교체이유 없다”고 반려했다. 당시 이 나라는 신문사 발행인 교체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수준이었다.

연이어 어임영 기자 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간첩 체포사실을 보도한 경향신문 사회부 어임영 기자를 59년 4월24일 국가보안법 제21조 4항, 제6조 3항 위반으로 구속기소했다. 어 기자는 24파동으로 통과된 국가보안법 발효 뒤 첫 구속자였다.

이렇게 경향신문은 자유당 정부 말기에 폐간됐다. 그러나 진짜 문을 닫은 건 자유당 정권이었다. 자유당은 다음해 대통령 선거부정을 규탄하며 들고일어난 국민들 앞에 항복했다. 경향은 4·19 혁명 뒤 곧바로 복간해 지금도 살아 있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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