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
노동센터 소장

비정규직 최장기 투쟁사업장인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의 투쟁이 지난 26일 노사합의 조인식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2007년 12월21일 본사 앞 농성투쟁에 들어간 지 2천76일 만이다.

같은날 하늘감옥인 혜화동성당 종탑 고공농성 투쟁을 이어 온 오수영 재능교육지부장 직무대행과 여민희 조합원도 202일 만에 땅을 밟았다. 가장 추운 혹한의 한겨울에 올라가 가장 더운 한여름까지 버틴 그 위태위태한 곳에서 안전하게 내려오게 돼 참 다행이다.

가족들의 걱정 속에서 건강이 썩 좋지 않음에도 악질 자본에 맞선 장기투쟁을 굽힘 없이 전개해 투쟁 과정에서 암투병으로 운명한 이지현 조합원까지 포함한 해고자 전원복직과 숙원사업이던 단체협약 원상회복을 쟁취했으니 상당한 성과다. 투쟁주체인 재능교육지부 조합원들과 지속적이고 헌신적으로 연대한 수많은 노동자와 시민의 힘이 모아져 만들어진 결실이다. 한때 3천800여명까지 조합원이 확대됐던 재능교육지부가 자본과 정권의 전방위적 탄압 속에서 고사 직전으로 몰렸다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재능교육지부가 어떤 곳인가. 99년 파업으로 한국 사회 특수고용 노동자 투쟁의 서막을 연 역사적인 노조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노조 투쟁과 함께 전체 비정규직 투쟁의 시원이 된 투쟁을 승리로 이끈 노조다. 2000년 특수고용 노동자 최초의 단협 체결로 노동자성을 쟁취해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은 노조이기도 하다. 투쟁 과정에서 생긴 암으로 속절없이 목숨을 잃은 정종태 전 위원장 등 그간 얼마나 많은 희생과 우여곡절이 있었는가. 참으로 가뭄의 단비처럼 간만에 맞는 투쟁 승리 소식에 감회가 남다르다.

재능교육지부의 투쟁과 합의는 노동자임에도 노동자성이 송두리째 부정당해 헌법과 노동관계법에서 정한 노동권을 박탈당한 250만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사라진 사용자 책임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응당 직접고용 정규직화해야 할 노동자들을 간접고용 또는 간접고용이 극단화한 특수고용직으로 남용하고 양산해 온 대기업의 행태로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마저 묵살하는 현대자동차나 근로기준법도 위반한 삼성전자처럼 실질 사용자임에도 사내하청업체나 협력업체 뒤에 숨어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슈퍼갑들 때문에 사회가 온통 시끄럽다.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법치를 강조해 온 박근혜 대통령은 간접고용과 특수고용 문제와 관련해선 뒷짐을 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참에 단협 원상회복 합의를 통해 노조를 인정받고 노동자성을 쟁취한 재능교육지부의 투쟁은 한국 사회 사용자들의 고의적인 법적·사회적 책임 회피에 경종을 울렸다.

남은 과제는 250만명으로 추산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현실을 도외시한 부실한 법·제도로 노동자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이미 지난해 11월 서울행정법원이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노동자라고 판결했듯이, 더 이상 노동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법적 지위 문제를 외면해선 안 된다.

다종다양한 양태로 확산되는 특수고용직 실태를 밝혀내는 연구·조사와 함께 근로기준법과 노조법 개정을 통해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방책이다. 노동자성 인정 전에라도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등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회복지 사안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거나 죽어도 아무런 보상조차 받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실업 상태가 되더라도 최소한의 생계 보전책은 마련돼야 한다. 그래서 헌법에서 정한 노동 3권과 행복추구권이 위장자영인으로 불리며 자신의 노동자 정체성을 묵살당해 온 특수고용 노동자에게도 적용돼야 한다. 지금도 노동자성 쟁취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특수고용 노동자들 어깨 위에 짐 지운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도록 정부와 국회가 앞장서야 한다. 직접고용 정규직으로 채용하거나 전환해야 할 노동자들을 특수고용직으로 남용해 온 사용주들도 최우선 사회적 의제가 된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대해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고 전향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마땅하다.

주마등처럼 십수 년 재능교육지부 투쟁의 주요 장면과 인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더 이상 기본적인 노동권을 박탈당해 신음하는 노동자들이 양산돼선 안 된다. 극단적인 장기투쟁으로 노사갈등이 비타협적 적대로 치닫는 일도 지양해야 한다. 한국 사회 노동시장의 하향평준화 주범인 특수고용직 문제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함께 문제 해결책 마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재능교육지부 투쟁이 남긴 과제는 이제 노사정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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