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지난 15일은 광복 6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전날 전야제를 하고 당일 독자적으로 기념식을 치렀다. 기념식을 마친 후 시위를 벌였다.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공작과 은폐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국정원을 개혁하거나 해체하고, 대통령이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 과정에 많은 노동형제들이 경찰에 연행됐다. 면회도 거부됐다. 48시간을 다 채우고 석방됐다. 엄중하게 다루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날 박근혜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국정원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노동자나 일반 국민의 예상과 기대를 깔아뭉갰다. 많은 노동자와 국민이 그의 그런 무책임한 처사에 분개했다. 어쩌면 그렇게 나 몰라라 하는가, 국민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 아닌가라는 항의였다. 국민의 항의에 대해 청와대는 광복절 기념식이기 때문에 광복과 직접 관련된 문제만 언급했다고 했다. 잘못한 게 아니라 나 몰라라 한 것이 오히려 원칙에 맞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광복의 대상인 일본에 대해 묘한 말을 했다. 최근 아베 일본 수상은 이른바 종군위안부(정확하게는 성 노예제) 문제에 대해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93년 고노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과한 ‘고노 담화’ 부정),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대해 사과도 하지 않겠다고(95년 무라야마 총리가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뜻을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 부정) 했다. 또 전범들을 안치한 신사에 참배를 해도 좋다고 말하면서 전범들의 제사에 쓰라고 사비로 돈(타마쿠시 료)을 바친다. 이뿐이랴. 헌법 해석을 변경해 동맹국(예컨대 남한)이 공격받았다는 이유로 자위대가 다른 나라(예컨대 북한)를 공격할 수 있도록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추진하고, 헌법을 바꿔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바꾸고, 일왕을 ‘국가의 원수’로 명기하려 한다. 이렇게 평화헌법을 바꿔 ‘정상적인 국가’로, 다시 말해 제국주의 시절로 되돌아가겠다고 한다. 부수상 아소 다로라는 자는 올해 4월 신사참배를 하더니 지난달 29일 ‘국가기본문제연구소’의 연구회 강연에서 “나치의 수법을 배워 비밀리에 개헌하자”고 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언급 한 마디 없이, 일본 정부의 행위에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해 달라고 스마트하게 당부했다.

“과거를 직시하려는 용기와 상대방의 아픔을 배려하는 자세가 없으면, 미래로 가는 신뢰를 쌓기 어렵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 줘야 한다.” 이런 부탁은 과연 원칙에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광복절은 다른 누구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일본 국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 겨레가 해방된 날이다. 빛을 되찾은 날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숨죽이고 살다가 태양이 비추는 대낮에 떠들며 살기 시작한 날이다. 어둠을 거두고 새벽을 맞이한 날이다. 바로 그날에 바로 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그 몰지각하고 반인륜적인 작태를 엄하게 꾸짖고, 그런 작태를 당장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고치지 않을 경우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단호한 실천의지를 표하지 않고 그렇게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이 과연 원칙에 맞는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에 행한 기념사는 그야말로 원칙에 맞지 않는다. 이날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러한 지배와 침략을 두 번 다시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슴깊이 되새기는 자리인 동시에, 그러한 지배와 침략을 자행한 세력들에게 두 번 다시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는 자리다.

또한 이 땅에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친일, 친제국주의 세력들에게 과거 자신들의 죄과를 깊이 반성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도록 하는 자리가 돼야만 한다. 그것이 광복절의 취지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념사에서는 우리가 기대한 이런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침략당하고 지배당하고 착취·수탈·압박·살해당한 우리 겨레의 '아픔'을 좀 '배려'해 달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달라고 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게, 우리에게 죽임을 강요한 자들에게 요즘 유행하는 힐링을, 우리 겨레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힐링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향후 한·일 지배계급 간 신뢰와 협력이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원칙을 중시하는 박근혜 정부의 대일외교 원칙이다. 부르주아 국제주의 원칙! 참으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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