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애림
전국비정규직
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2000년 봄의 일이다. KBS의 방송차량을 운전하는 기사들이 그해 6월 말일자로 해고통보를 받았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사연을 들어 보니 KBS에서 수년간 방송차량을 운전했는데 처음엔 정규직으로, 다음엔 용역업체 소속으로 똑같은 일을 했는데 갑자기 파견법 때문에 계속 일하는 게 어려우니 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옛 파견법상 사용사업주가 2년 이상 파견노동자를 계속 사용할 경우 직접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조항을 회피하기 위해 KBS가 파견근로기간 2년이 도래하는 기사들을 일제히 계약해지하고 다른 파견노동자로 교체하려고 했던 것이다.

98년 7월부터 시행된 파견법이 적용된 노동자 수만명이 2000년 당시 비슷한 계약해지 통지를 받았고 여러 노동·사회단체들은 이를 ‘파견노동자 대학살’이라 부르며 파견철폐공동대책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계약해지를 앞둔 방송사의 용역기사들은 방송사비정규노조를 결성했고 초대 위원장을 맡은 사람이 지금의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이다. 방송사비정규노조의 수년간 투쟁의 결과로 KBS는 자회사인 KBS비즈니스가 차량운전기사들을 직접고용하도록 바꿨다.

비슷한 시기에 SK(주)의 저유소(기름을 저장하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찾아왔다. SK가 주식을 100% 소유한 인사이트코리아라는 손자(孫子)회사 소속 계약직이지만 실제 채용부터 인사·지휘·감독에 이르기까지 SK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이들이 SK인사이트코리아노조를 결성하자 원청인 SK의 관리자들이 직접 노조탈퇴를 강요했고 그 결과 수백명에 달한 조합원들이 해고 위협에 노조를 탈퇴했다. 결국 위원장·부위원장·사무국장·조합원 단 4명만 노조에 남아 3년간 SK를 상대로 복직투쟁을 벌였다.

2003년 9월 대법원은 SK와 인사이트코리아 소속 노동자들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근로계약서상 고용주였던 인사이트코리아는 법적으로 실체가 인정되지 않고, 원청인 SK와 노동자들 사이에 직접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3년이 넘는 외로운 투쟁 끝에 해고노동자 4명은 SK의 정규직이 됐고 지금까지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투쟁을 통해 간접고용의 실태가 밝혀졌고 이후 파견·용역·하청 노동자들의 노조결성과 직접고용 투쟁이 이어졌다. 캐리어사내하청노조·이랜드노조·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지회·철도노조 KTX승무원지부·증권노조 코스콤지부와 같은 제조업·서비스업·사무직 등 다양한 업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노조를 만들었다. 자신은 사용자가 아니라고 발뺌하는 원청을 상대로 사용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며 투쟁했다. 그 연장선에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나 케이블방송 노동자들의 투쟁이 놓여 있다. 이 과정에서 ‘파견근로자를 보호’한다는 파견법의 허구성이 드러났고, 그 허울 좋은 파견법마저 회피하고자 하는 원청들이 ‘진짜 사장’이라는 법적 판단이 이어졌다.

10여년간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진 만큼 이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대응도 진화해 왔다. 완성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법적 판단이 내려지자 불법파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정규직과 사내하청의 혼재공정을 분리하고 공정 자체를 아예 외주화하는 이른바 ‘진성도급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자본의 대응전략을 따라잡지 못하는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같은 사업장 내에서도 불법파견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오락가락 판정을 내놓고 있다.

정부는 한술 더 떠서 허울뿐인 파견법마저 개악해서 직접고용 간주조항을 무력화했고, 아예 간접고용을 전면 합법화하는 사내하도급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정부의 이런 시그널에 고무된 자본은 간접고용에 물꼬를 터 준 파견법마저 기업규제법이라며 아예 위헌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간접고용에 관한 자본과 국가의 전략이 진화하는 데 발맞춰야 할 운동진영은 어떤가. 불법파견은 현행법마저 위반하는 간접고용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합법적 간접고용’과 ‘불법적 간접고용’에 관한 현행법의 테두리에 제한되는 한계를 가진다. 원청이 채용·인사나 업무수행에 직접 관여한 증거가 있어야만 ‘불법파견’이고 중간업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제할 경우 ‘적법도급’이라는 현행 법해석의 한계를 뛰어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 불법파견 여부와 무관하게 노동력 활용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에게 사용자로서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접근은 어떨까. 이미 건설업 등에서는 불법파견 여부와 무관하게 하나의 사업 내에서 도급이 이뤄지는 경우 원청이 임금·산업안전·사회보험 등 사용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규정들이 존재한다. 이것 역시 건설노조의 십수년 투쟁한 결과물이다. 대학 청소노동자들 역시 불법파견과 상관없이 원청인 대학을 상대로 생활임금·고용안정·노조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해서 대학과 합의서를 작성한 사례들도 많다.

요즘 회자되는 을의 반란, 을의 연대는 이런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고용인지 도급인지 파견인지에 상관없이 자신의 사업을 위해 노동력을 활용하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 자신의 노동조건을 좌우하는 자를 상대로 단결하고 교섭할 권리를 쟁취하는 것, 그것이 노동운동과 노동법이 변화에 맞춰 전진하는 방향이 아닐까.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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