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87년 체제는 한계에 달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모두 87년 민주화 투쟁의 결과물이다. 25년 전 거리에서 다 하지 못한 구호와 함성을 일단 절차적 민주주의 안으로 갖고 들어와 해결해 보기 위해 우리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 왔다.

이명박 정부 내내 시끄럽던 방송통신위원회 구성도 87년 체제가 낳았고, 이번에 파행으로 끝난 ‘밀양 송전탑 협의체’ 보고서 채택 건도 마찬가지다.

처음 밀양 송전탑 저지 대책위원회가 협의체를 구성한다고 했을 때 나는 우스웠다. “이분들 왜 모든 위원회가 7명, 9명, 21명 등 홀수로 구성돼 있는지 모르나 보네”하고. 결국엔 4대 3, 5대 4, 11대 10으로 끝나고 마는 들러리를 이들이 왜 굳이 자청하고 나섰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번에 구성된 협의체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줬다. 4대 4 동수에 나머지 한 사람을 여야 공동추천으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정말 팽팽한 토론이 이어지겠구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40일 휴전 끝에 나온 결과는 참담하다. 저들이 늘 해 왔던 대로라면 5대 4로 끝나야 할 보고서 채택이 6대 3으로 끝나고 말았다. 주민측 추천위원인 김아무개 교수까지 저들의 말에 동의해 버렸다. 주민측은 멘붕 상태에 빠졌다. 보수언론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잽싸게 낚아채 인터뷰했다. 한국경제신문엔 그분의 말이 제목으로 달렸다.

“밀양 송전탑 건설 필요 … 떳떳하다.”

놀라운 순발력이다. 하루가 지나자 10일자 조선일보는 <밀양 송전탑 협의체 참여한 NGO들 왜 약속 뒤집나>라는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점잖게 이들을 나무라면서 6대 3이라면 수용해야 하지 않느냐는 투다. 물론 조선일보 사설도 주민 반대대책위가 추천한 김아무개 교수까지 보고서 채택에 동의한 점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일보 사설은 김 교수가 그냥 주민 반대대책위가 추천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실체적 진실은 약간 다르다. 김 교수가 협의체에 들어간 인연은 따로 있다. 김 교수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한 민주당 의원에게 전력계통 운영시스템(EMS) 문제를 자문한 인연으로 반대 주민측의 추천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당을 믿고 국회라는 뻘밭으로 어른들을 밀고 들어간 대책위의 실무진들도 안타깝다. 이명박 정부 땐 역시 민주당의 추천을 받은 방송통신위원, 그것도 상임위원이란 사람이 거대 통신재벌로부터 술추렴을 받다가 톡톡히 망신을 샀다. 그는 아직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까지 나오자 녹색당과 에너지정의행동은 10일 공동성명서를 내고 조선일보를 향해 “사실 왜곡을 중단하고 즉각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보고서가 참여 위원들이 합의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위원장이 임의로 취합한 의견을 일방으로 작성한 것이고, 한전측 위원들의 보고서 베끼기와 대필 의혹까지 겹쳐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눈엔 이런 게 보일 리 없다.

이런 위원회는 한편의 잘 짜진 드라마처럼 저들은 일치단결하고, 이쪽에선 늘 1명 정도 신발을 거꾸로 신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혼란스런 결과물에 종지부를 찍는 역할은 늘 언론이 도맡아 해 왔다. 마치 엄정하고 객관적인 심판처럼.

언론은 이렇게 25년 동안 절차적 민주주의 또는 대의민주주의를 국민의 목소리로 포장해 왔다. 언제까지 대의민주주의가 지고지선이라 믿는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새로운 세계는 가능하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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